1993년에 [표준새번역]이 나왔을 때 요 11:9은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라고 번역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개정되어 나오면서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에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라고 고쳐져 나옵니다. 이런 개정 내용은 이름만을 바꾼 [새번역](2004)에서도 “햇빛”으로 그대로 나옵니다. 제가 아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대다수의 번역들은 우리말 [개역한글판](1961)이나 [개역개정판](1998)처럼 “이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하는데 왜 [표준새번역 개정판]과 [새번역](2004)은 그리스어 “이 세상의 빛 / τ? φ?? το? κ?σμου το?του)”을 “햇빛”이라고 번역하였나요? “아, 쉬워서!”가 아니라 “아쉬워서!” 묻습니다. 결핍증 缺乏症 드림

결핍증 님,

저는 지금 제 둔한 머리를 한 대 꽝 쥐어박고도 어디선가 웃고 계실 귀하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이렇게 해놓고 왜 아직 가만히 있느냐고, 저 같은 둔재 좀 깨우치게 하려고,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저로서는 귀하께서 좀 설명을 해주실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왜 질문만 턱 던지고 마시냐고 원망도 하고 싶습니다.
초역을 완성해 놓고서도, 번역 팀에서 여전히 갑론을박이 이어진다는 것은 귀하께서도 능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개정 단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개정 대상이 되는데, 요 11:9 “이 세상의 빛 / τ? φ?? το? κ?σμου το?του”을 “햇빛”으로 개정한 것이 번역 팀에서 논의되었던 것인지, 문장 팀에서 논의되었던 것인지, 마지막 종합검토 때 논의되었던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이 문구가 번역자들이나 문장가들 사이에서 문제가 될 수는 있었겠다 싶습니다.
제가 한 때 대한성서공회 번역 책임자였던 것을 기억하시고, 어렵게 물어주신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귀하께서는 “요 11:9 ‘이 세상의 빛’이 ‘햇빛’이냐?”고 물으셨지만 제가 감히 귀하의 의중을 살펴, 이런 번역은 “상상력을 제한하는 번역”이 아니냐 하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귀하께서 바로 이 점을 나무라신 것 같기에 이렇게 한 겁니다.
“번역은 실패의 예술이다/ translation is the art of failure”. 이탈리아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가 인용한 말로 잘 알려져 있지요. 아마도 이탈리아 현대 작가 치고 자기 작품이 전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된 작가는 이 작가 말고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작품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때로는 오역, 때로는 이탈리아어로 표현이 덜 된 것이 다른 언어에서는 훨씬 더 잘 표현된 것들을 확인하면서 그 작가는 비록 번역이 때로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예술적”이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을 일컬어 실패의 예술이라고 많이들 말하는데 최초 발화자가 누군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번역학계에서는 “번역자는 반역자”라는 이탈리아 격언처럼 이것도 이미 굳어진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 ‘토 포스 투 코스무 투투/ τ? φ?? το? κ?σμου το?του’(요 11:9)는 귀하께서 지적하신 대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번역들 대다수가 다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합니다1). 우리말 번역들도 [새번역]을 제외하고는 문자 그대로 번역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개역] 요 11:9)

예수께서는 "낮은 열 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공역] 요한 11: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표준] 요 11:9)

현재의 문맥에서 “이 세상의 빛”은 낮에 비치는 “햇빛”을 말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어 번역 중에서 다음 두 번역은 이런 이해를 반영합니다. CEV는 “햇빛”으로, MIT는 햇빛을 가리키는 “자연의 빛”으로 번역합니다.

Jesus answered, "Aren't there twelve hours in each day?
If you walk during the day, you will have light from the sun,
and you won't stumble.
(Joh 11:9 CEV)

Jesus answered, "Are there not twelve hours of daylight?
If anyone moves about in daylight, he does not stumble
because he sees by natural light. (Joh 11:9 MIT)

위 번역이 틀린 번역이라고 볼 수는 없어도 “이 세상의 빛”이 “햇빛”과 “예수”를 다 연상하게 하는 다중의미 多重意味는 차단해버리고 말지요. 요한복음서 독자들이 ‘토 포스 투 코스무 투투 / τ? φ?? το? κ?σμου το?του’(요 11:9)라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이 연상하는 또 다른 대상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에고 에이미 토 포스 투 코스무’ 곧 “이 세상의 빛 / ?γ? ε?μι τ? φ?? το? κ?σμου”이라고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지요(요 8:12). 예수께서도 당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당신의 아버지께 이제 곧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곧 어둠이 다가오는데, 어둠 속에서 걷다가는 또 실족하여 넘어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문자대로의 번역을 선택하면 의미장 意味場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하는 생각, 너무 구체적으로 번역해버리면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번역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귀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민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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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light of this world” (Joh 11:9 ASV외 대다수 영어 번역); “la lumiere de ce monde” (Joh 11:9 BFC 외 대다수 프랑스어 번역); “das Licht dieser Welt” (Joh 11:9 EIN 외 대다수 독일어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