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두 살이었던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지식층이었던 아버지는 납치를 당하셨거나 월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그 후 어머니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우리 남매를 기르셨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고, 오빠가 초등학교 시절,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는데도 가정교사를 두었을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셨다.

지나간 1970년대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두루 퍼졌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몇 십 년, 어머니는 망부석이 된 듯 돌아가실 때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으시고 느릿느릿 눈동자만 움직이셨다. 당시에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후에 생각하니 아버지를 기다리셨던 듯하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성격도, 체격도, 책읽기 좋아하는 것도. 어머니는 신혼 초부터 늘 책만 끼고 사시는 아버지가 미워서 책을 아궁이에 넣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머니가 참 답답하셨을 듯했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동아리 친구 5명과 지리산으로 캠핑을 갔다. 그때 힘없이 내리는 첫눈을 보고 “와! 첫눈이다!”하고 하늘을 향해 탄성 지으며 웃는 한 남학생의 선한 웃음에 나는 그만 가슴이 무너지고 말았다. 소담스레 내리는 눈도 아니고 탐스런 함박눈도 아니었다. 그냥 힘없이 사뿐히 내려앉는 눈이었을 뿐이데. 첫눈이라고 하기엔 감동이 없었다. 그 시원찮은 눈을 보면서 탄성을 지르는 그가 어린아이 같아보였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그깟 시원찮게 내리는 몇 가닥 눈을 보고 첫눈이라고 감탄하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그 선한 웃음이 바로 내 눈에 콩깍지가 되었다. 늘 아버지를 동경했던 나에게 그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의 큰 키와 안경 쓴 모습이 사진 속 내 아버지를 쏙 닮아 있었다.

70년대에 종로 2가는 젊은이의 거리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음악다방이었던 갈릴리 다방은 우리가 들어서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가 자동으로 울려 퍼졌다. 팝송은 좋아했지만 클래식은 별 흥미가 없었던 내게 그는 끊임없이 클래식을 들려주었고, 원고지에 빼곡히 눌러쓴 편지가 매주 학교 우편함에 있었다. 그 편지를 읽으려면 뒤집어서 햇빛에 비추어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거꾸로 뒤집힌 글씨가 특이했다. 그렇게 우리는 2년 정도 갈릴리다방을 들락거렸다.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 더 만났지만 헤어졌다. 어머니가 우리의 사귐을 극구 반대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연애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딸을 아버지 없이 기른 것도 억울한데 사위마저 ‘애미 애비’ 없이 자란 사람에게 절대 보낼 순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 통에 이모부를 따라 남하해서 이모부가족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었다. 27년 동안이나 관절염을 앓고 계셨던 어머니에게 단식은 곧 생명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늘 우리 남매만을 위해 사셨고 ‘내가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반발하기도 했으나 어머니를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어머니의 인생은 없었다. 내 인생도 없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어머니 것이었다. 어머니의 인생이 곧 내 인생이었다.

첫눈은 늘 힘없이 슬그머니 내린다. ‘나 첫눈이야’라고 신고만 할 뿐, 한참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함박눈이 쏟아진다. 그때마다 활짝 웃는 선한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내게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통일도 기다리지 못하시고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시는 애미 애비 없는 다른 사위를 맞이하고 2년 후 황망히 떠나셨다.

2015년 초 박대통령은 ‘통일대박’이라는 말로 통일여론을 이끌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통일은 내게 절실함이 사라졌지만 가슴만은 쿵쿵거린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미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셨을 지도 모른다. 박대통령은 당신이 말했던 통일대박을 이루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다음 대통령 때를 기다려야 할까. 나도 어머니처럼 아버지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려나? 지금 이 순간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다 가신 어머니가 그립다. 아니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