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08/2007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42)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수많은 종교 전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들의 신앙을 지성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매력은 그들의 종교의식과 이미지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제랄드 맨리 홉킨스 Gerald Manley Hopkins가 “세계는 하나님의 위엄으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할 때, 나는 그 말을 우리가 자연과 예술의 가슴 설레는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일별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내가 아일랜드 동쪽의 항구 골웨이 Galway에 가서 하루는 햇빛 비치는 바닷가에서 가물가물 물결치는 소박한 모양을 보며 보통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자연 속에서 “당신 Thou”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게 된 바로 그거다.

나에게는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차적인 증명이다. 아름다움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끝내주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지식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가장 끝까지 이끌어 준다. 감상에 젖어들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움은 꼬인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심지어 잔인한 것도 끌어안는다. 예술가들이 종종 어지럽힐 정도로 보여주듯이 심지어 우리 인간성의 가장 어둡고 가장 낮은 데에도 아름다움이 어느 만큼은 남아 있다. 세상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움이 배제된다면 세상을 감지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과 같다.

본회퍼가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호송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가족과 약혼자와 떨어져 사는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도 그의 동지들이 눈여겨보니까, 거의 확실하게 다가오는 처형을 직면하면서도 그는 유모어 감각과 친절과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인격의 아름다움은 그의 잔혹한 운명이 비극으로 드러날 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나타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도전적이면서도 의기를 드높이는 신학을 저술하였고 희망으로 가득찬 시를 썼으나 결코 비현실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논증해 보여 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성숙한 신앙은 방어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도 도피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실패를 대가로 지불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한 것에 대한 보상도 아니다.

가장 마음을 기울일 역설은 이런 성숙한 신앙이 명시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과 인간의 필요에 대한 세속적인 주장에다 전심으로 투신한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종교적이라 할 것이다. 진짜로 중요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현존을 계시하는 것은 비움과 끝이 열린 개방성과 신뢰와 무릎꿇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눈도 보지 못 하였고,
어떤 귀도 듣지 못하였고,
어떤 손도 만져보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 생기지도 않았던 것을
내가 주겠다.”

도마복음서

20. 예수 그 위대한 상상

나는 평생 동안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예수에 관하여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내 자신의 영성 수련의 과정을 근거로 삼지 않았다면, 붓다나 모하메드나 노자나 다른 영적 인물들을 또한 소개하였을지 모른다. 내가 이제 와서 예수의 이미지를 수정하려 하는 것은 나와 같은 크리스챤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 어떤 것인지를 또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크리스챤들과 같이 나 역시 생의 대부분은 예수의 발걸음의 반향 反響과 말씀의 울림을 늘 나의 배경 속에 지니며 살아왔다.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이점 가운데 하나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서 마침내 우리의 기억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서 꾸준히 북 소리처럼 울리며 예수의 예리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말씀의 리듬을 유지시켜 준다.

그의 가르침은 시행하여 인가를 받아야 할 신앙의 법전이 아니고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생한 비전이다. 나는 랍비 해롤드 쿠슈너 Harold Kushner 와 랍비 로렌스 쿠슈너 Lawrence Kushner의 저술 속에서도 깊이 있게 울려나오는 스토리텔링의 맥박소리를 듣는다. 나는 평생 동안 그런 이야기와 해설을 들을 수 있었던 그들의 회중이 부럽다. 나는 이슬람 전승의 훌륭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할 수피 스승의 도제가 되어 몇 년이라도 세월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잠시나마 규칙적인 교회 출석을 떠나서 세계 종교를 연구한 것이 결과적으로 예수가 과거와 현재에 어떤 분인가라는 나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예수와 그를 우상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교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줄었다. 나는 인간의 영성사 속에 그의 현존의 미스테리 쪽으로 더욱 끌리게 되었다. 나는 그를 의미 있는 무시간적인 현존으로 보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혼돈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또한 지속적인 비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수, 곧 영원한 예수, 신화와 상상의 예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의 신관처럼, 예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더욱 투명해졌다. 내가 그에게 초점을 맞춰서 집중하기 보다는 그의 눈을 통하여 삶을 본다. 그럼에도 나는 예전에 이 모든 것이 명시적이었던 때보다도 지금에 와서 더 기독교적이고, 더 가톨릭적이며 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든다. 이는 마치 기독교를 내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에 불어넣은 듯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더욱 성숙된 듯싶다. 내 속에 있는 기독교의 색채는 불교와 그리스의 이교 신앙과 르네상스 시대의 혼합주의와 수피즘과 도교의 비움과 유대교의 각기 다른 빛깔로 섞였다. 이는 희미해졌거나 산만해진 기독교가 아니라 보다 더 풍부하고 더욱 복합적인 영성의 비전이며, 다른 비전과 대조적으로 정의를 내려서 얻는 힘이 아닌 그런 힘을 얻는 비전이다.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를 통하여 신성이 발견된다는 것을 믿는데 아무 어려움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의 꾸밈없는 가르침으로부터 대형교회의 허례허식으로 옮겨 갔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의 처음 제자들은 어부들이었고 상인들이었고 가정주부들이었다. 오늘날 자주 그의 삶이 지닌 소박함을 무시하고, 그 대신에 스스로 제국적인 조직에 여념이 없는 강력하고도 근엄한 사람들이 그를 대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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