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1/2008

 

 

 

 

 

 

 

 

 

 

 

 

에니어그램영성 (82)

 

자기관찰

 

 

 

 

 

  “너 자신을 알라!
그 무엇도 지나치지 말라!
매사를 스스로 검증하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글

제공 :
공동체성서연구원


에니어그램 격언






 


에니어그램은 제 4의 길 the Fourth Way의 상징이다. 감성과 지성과 본능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 요체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면 이룰 수 있는 조화와 균형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따라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여러 기능과 능력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부조화와 불균형 속에서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할 필요성을 거의 못 느끼고 산다. 늘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을 느끼고, 두 번 생각하고, 자기가 현재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왜 원하는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성취되면, 자기에게 무엇이 돌아오는지 아니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생각하면, 그 시간이 비록 짧더라도, 스스로 안정감을 얻는다. 그런 경험이 얼마나 좋고, 그럴 때 얼마나 편하면서도 행복한 줄 안다. 안타깝게도, 다음 순간 다른 무엇에 쫓기듯이 그런 상태 밖으로 끌려 나간다.

자기를 안다는 것이 곧 자각 Self-Knowledge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대단히 큰 문제이다. 그럼에도 어찌 보면 막연하고 거리가 먼 목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누구라도 한 때는 짧게라도 경험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를 알았던 것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자기를 알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 흔히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런 ‘자기 공부 self-study’의 일환이다. 이때, 자기 공부의 주요한 방법이 바로 자기관찰이다. 인간의 조화로운 발달의 수레바퀴가 두 개인데 그중하나가 자기 기억이요, 또 다른 하나가 자기관찰이다.

자기 기억과 올바른 자기 공부의 방법을 배우려면 사람이 기계적으로 살고 있는 특징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하고, 자기의 여러 가지 기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자기관찰의 두 가지 주요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분석이다. 또 하나는 기록이다. 종이에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입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는 너무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생각과 느낌과 행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지, 어떻게 균형이나 조화가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한다.

자기관찰과 자기 공부의 시작은 불쾌한 감정을 포함한 부정적인 감정표현 안하려고 애쓰는 데서부터 가능하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유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기를 지탱하고 잘 나가는 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안 하려고 애쓰면, 먼저 그만큼 절제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고통과 고난을 견디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깨어있게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자기관찰은 삶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또는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기계성과 타성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새삼스레 발견하게 해준다. 우리 내면에 있는 여러 기능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고 균형이 깨져있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각기 움직이고 역할을 하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발견은 자연히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관찰을 하면 먼저 자기 내면의 기능과 과정에 변화가 있어야 됨을 주목하게 된다. 이런 정도의 자가도 내면의 과정에 빛을 비쳐준다. 그러면 작게나마 변화가 시작된다. 생각과 느낌과 행동 사이에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부분적으로나 편파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던 타성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이 타당한지 안한지를 검증하지 않은 채 사니까 비현실을 현실로 살기를 잘한다. 이를테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을 산다. 그러나 자기관찰을 착실하게 하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의 내면의 과정이나 기능에 대하여 객관적인 증인이 되고 불편부당한 관찰자가 된다.

아이들 하고도 쉽게 이야기하고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둘씩 셋씩 나누어 앉거나 아니면 둘러앉아서 이야기한다. 먼저 ‘내가 보는 나’를 이야기 하고 나서, 다음에는 ‘남이 보는 나’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대개 남을 보는데 비하여 자신을 못 본다. 특히 단점이나 결함에 대하여, 남의 것을 잘 보는데, 자기 것은 잘 못 본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말이 있다. 자기관찰을 얼마나 못하고들 사는가를 웅변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자기관찰을 못하고 살면, 그만큼 비현실적이고, 따라서 지어내고, 꾸미고, 가면을 쓰고 산다. 남들은 다 아는데 자신만 모르고 산다. 이런 사실을 밝히 깨닫고 의식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관찰이 자기 기억과 연계된다.

이런 점에서,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좀 더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을 찍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자기관찰 한 것을 사진을 찍듯이 기억 장치 속에 정사진 still picture/photo으로 담아 놓는 것이다. 세밀화보다는 전체 사진을 담는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였는가를 기록으로 남겨 놓는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꺼내 볼 수 있다.

수시로 변하는 감정을 포착하여 사진을 찍고,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을 할 때를 잡는다. 더 나아가서 생각 없이 느낌도 없이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며 행동하는 순간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그런 부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 모아서 전체 앨범으로 다시 본다. 그러면 자기 내면의 과정이 어느 정도 불균형과 부조화 속에서 기계적으로 타성 inertia에 의하여 살고 있는가를 재발견한다.

앞서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관찰을 하면서 심각하게 발견할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나 종류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공통적으로 부정적으로 감정을 예사롭게 표현하는 것이 있다. “안 돼”, “못해”, “어려워”라는 말은 수없이, 빈번히 뱉어낸다. 그러면서, 짐짓 태연하게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위축되는가?

누구나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부정적인 표현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나 남에 의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안 돼”, “못해”라고 말하면서, “너는 잘 할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하고 위로하며 인정하는 말을 속으로는 무척 원한다. 이렇게 못한다는 말을 하는 ‘나’와 나도 마음먹으면 잘 할 수 있다는 ‘나’가 공존한다.

이야기가 여기쯤 오면, 냉혹한 사실 앞에 서서 자기관찰을 하게 된다. 실은 ‘나’는 하나가 아니라 크게 보면 둘이고, 자세히 보면 수없이 ‘많은 나 Many I's’로 되어있다. ‘진짜 나 Real I’와 ‘가짜 나 False I’로 되어 있다. 격정을 사로잡는 ‘나’와 격정에 사로잡히는 ‘나’. 후자는 가면/mask를 쓰고 사는 나, 즉 ‘연극하는 나 persona’이다. 겉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관찰하기 시작하면, 자기관찰이 나를 깨운다. 무엇보다 격정에 대하여 자기관찰을 하면 나를 깨운다. 늘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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