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대상의 정체성을 인식할 때는 현재의 모습을 기준으로 한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을 보면 ‘학생’이라고 부르고 군복을 입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군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현재’라는 렌즈로 바라본 그 사람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의 과거는 어땠을까? 또한 미래에 그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의 온전한 인생을 알아갈 수 있다.

어르신께서 발표한 동시집이 앞에 놓여 있다. 아름다운 영상동화처럼 느껴지는 동시집이다. 시인은 일흔을 넘긴 어른이지만 인생의 동시성을 놓고 이야기 한다면 아이이고 청년이고 또 지금보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이다. 작가는 지금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일흔 살의 현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말하기도 한다. 시인이 깔아 놓은 ‘동시’라는 멍석 위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젊음과 연륜이 함께 소박한 잔치를 즐기고 있다. 잔치 상에는 유머와 위트 교훈이 놓여 있지만 가르침이 없어서 더욱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시를 읽으며 배우는 것이 많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장맛이 달랐는데 사람마다 글씨도 각각이었는데 요샌 모두 그게 그거라는 어르신의 말씀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현대 사회는 바쁘고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그 속도를 맞출 수 있는 매뉴얼은 아마도 하나인 듯하다. 그렇게 복제된 삶의 방식에서 개성과 창조를 발견하긴 어렵다. ‘빨리빨리’를 말씀하시는 엄마와 ‘천천히’를 강조하시는 할머니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는 나는 나가 놀 수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런 딜레마를 이야기 하는 시인에게는 어떤 주장이 없다. 우리는 단지 시인이 제시한 상황과 조건으로 들어가 함께 그 아이가 되어 볼뿐이다. 아이의 역할을 맡은 우리는 참 바쁘게 살아왔고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할머니’라는 집에서 잠깐 쉬어가도 좋다. 동시집은 그렇게 편하게 마치 노는 것처럼 읽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 자체가 가볍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또한 가능하면 천천히 띄엄띄엄 읽기도 하고 혼자가 아닌 둘 혹은 셋이 함께 읽어봄직 하다.

이런 방식의 독서를 요구하는 작가는 고맙게도 독자를 창작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만 시인이 아니라 시를 읽는 사람도 시인인 셈이다. 시인의 작품에서 시인의 삶을 보며 독자들을 자신의 삶을 소급하면서 시를 확대해나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기네 집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손자와 나란히 1학년이 된 할머니는 손자의 선생님이면서 제자이다. ‘되는 일을 하라’는 응원은 다른 선생님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르지만 손자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배움이다. 반면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아는 할머니지만 학생은 처음이라 혼자서는 버겁다. ‘1학년’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외선생님의 안내가 필요한가 보다. 친절한 선생님을 따라 숙제도 하고 뜨문뜨문 연필 글씨로 영감님께 편지를 전한다. 직접 말하기 어려운 마음을 이제는 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그래서 늦깎이 학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손자와 할머니는 서로에게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호의존성은 세대 차이에서 오는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운다.

모기네 집은 기본적으로 가족의 이야기지만 가족주의로 끝나지 않는다. 그 가족 구성원이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은 기본적으로 사회문제다. 생신날 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꽃을 전하러 지하철을 갈아타는 할아버지와 학교에서는 잠을 자고 한밤중에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 평생 일을 하며 살았던 할아버지는 여전히 일에 내몰리고 있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학생은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두 분의 삶에는 ‘빈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너무 란 말 너무 쓸 수밖에 없는 너무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라는 희망은 아직 유효하다. 누가 가져온 건지 모르는 화장실에 걸려 있는 수건 한 장을 다음 번 목욕탕 갈 때 갖다놓겠다는 의지는 잃어버린 신용의 회복이다. 또한 빨리 고치기보다는 제대로 고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는 속도보다는 느림이 우선시 된다

작가가 이 시집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소외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소외, 교육의 소외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소외 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외에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는다. 놀이터 의자 밑에 놓인 길고양이 밥에서 모기와 거미가 사람과 함께 사는 화장실에서 그 가능성을 엿본다. 현관에 황토 묻은 시인의 검정 고무신이 보인다. 아! 할아버지다. 어쩌면 청년일 수도 아니 소년일 수도 있다. 오늘만큼은 끼리끼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 한꺼번에 머무를 수 있는 시인의 작은 사랑방이 준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