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은 사악하기로 정평 난 인물입니다. 그가 통치할 때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소명을 받자마자 아합의 면전에 대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정도로 정의감이 펄펄 끓는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엘리야는 아합과 정면 대결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의 손이 미치지 않는 광야로 피신해서 내일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먹고 외아들과 함께 죽으려 했던 과부를 만난 것은 그의 피신처에서입니다(왕상 17:12).

당시는 아합의 국가 팽창주의로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쉴 새 없이 벌어지는 토목공사로 장정들 대부분이 징집되거나 부역에 차출되어서 죽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그 땅에는 과부가 많았지요. 게다가 극심한 가뭄과 질병으로 어린 자녀를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엘리야가 만난 과부도 예외 없이 외아들을 잃게 되는 처지가 됩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나그네를 환대할 정도로 너그러운 여인이었지만, 어린 자식이 죽어가는 마당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죄 때문에 외아들이 죽게 됐다’며 엘리야를 원망합니다. 곤경에 처한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매달려 기도합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그는 아합을 심판해야 한다는 열정은 강했지만, 생사의 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경험한 일은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이때의 절박했던 경험을 통해 아합과 대결하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저 유명한 갈멜산 대결(왕상 18:30-40)은 그렇게 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저 옛날 모세도 그랬습니다. 혈기 충천한 모세는 동족이 당하는 억울함을 풀어주려다 낭패만 당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혈기를 다스리며 역사 현장에 함께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기까지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혈기만을 앞세운 어린애에서 기다릴 줄 아는 어른이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칭 정의의 심판자라는 자만심으로부터 깨어나 광야와 같은 지난한 삶의 현장에서 은인자중하며 삶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자기 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각자의 구원을 성취하기를’(빌 2:12) 간절히 부탁하는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각자의 구원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의존적인 믿음에서 어른의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겠지요. 어린아이의 믿음은 칭얼대는 믿음이요, 책임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어른의 믿음은 참고 기다리는 믿음, 스스로 책임지는 믿음입니다. 무슨 능력의 사람에게서 안수를 받아야 큰 복이라도 받을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라면 유아기의 믿음도 아닌 참으로 유치한 믿음일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 가운데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당신이 기뻐하실 소원을 품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쉽게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소원을 품되 ‘행함’ 곧 어떻게 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쉬지 않고 궁구하는 ‘성찰’이 따라야 합니다. 한때 낭패를 경험했던 모세는 고난 가운데 있는 동족을 해방시켜야한다는 뜻을 40년 동안이나 품고 ‘행함’으로 마침내 동족 앞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소원을 품고 어떻게 그 소원을 이룰지 때를 기다리며 궁구했습니다.

탐욕에 등급이 있다면 지금 한국 사회를 미치게 만드는 탐욕은 최악의 등급일 것입니다. 우리는 탐욕의 배후가 사탄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고 지냅니다. 탐욕은 바늘구멍만한 틈만 보여도 기필코 뚫고 들어가 온 덩어리를 먹이로 삼습니다. 그러니 정의를 행사한다 해서 다 칭송받을 일이 아닙니다. 위정자들의 무능한 정의는 하는 일마다 실망을 안깁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恨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품고 살라고 했습니다. 자기 성찰을 모르는 정의, 생명을 보듬고 치열하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정의, 사탄과 정면 대결할 담력이 없는 정의는 불의 못지않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욕심을 내려놓지 못해 불의와 적당히 손잡은 무늬만 정의는 예수께서 가장 싫어하신 추하고 위선적인 정의입니다. 혁명에는 성공했으나 삶을 알지 못하는 무능함과 탐욕으로 인해 사탄에게 기회를 내준 혁명이 부지기수입니다. 스스로를 정의로 여기는 이들이 유념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