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과 안경점에 들렀다. 책과 컴퓨터 보는 일이 예전처럼 편하지 않아 둘 다 안경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시력 검사 후에 안경점 주인은 사십 대에 흔히 나타나는 노화 현상이니 돋보기를 쓰라고 권했다. 내가 “노안이죠?”라고 물었더니 그는 “노안이라뇨? 요새는 중년안이라고들 합니다”라고 답했다. ‘중년안 中年眼’! 이 말에 문득 ‘노안 老眼’이라는 익숙한 말을 두고 왜 이런 생경한 표현을 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노인’ 복지관이라는 이름을 ‘어르신’ 복지관으로 바꾸는 추세라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몇 해 전 서울시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노인을 대체할 행정 용어를 공모한 결과 ‘어르신’이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노인 老人’이라는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사실 ‘어르신’이라는 단어가 공적 맥락에 사용된다니 나로서는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어르신’은 가리키는 말(지칭)보다는 일상에서 부르는 말(호칭)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르신’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를 존중하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어르신 복지관’이라고 하면 노인을 복지를 누릴 ‘대상’으로 삼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집단만이 ‘주체’로 본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부르는 주체와 불리는 대상을 구분하는 말을 공적 영역에서 쓴다는 것 자체가 썩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이 주체들이 노인을 ‘어르신’으로 섬기며 존중하겠다는 선의로 충만하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복지관’이 사회복지라는 공공 부문에 속하는 만큼 주체와 대상을 양분하는 표현보다는 관련자를 포괄하는 객관적 표현을 사용하면 더욱 좋지 않나 생각한다.

‘중년안’이라는 신조어도 그렇다. 이는 아직은 ‘노인’으로 불리고 싶지 않은, 곧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데 노인이 되어가는 일을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두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엉뚱한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눈도 침침해지고 체력도 점점 약해지는 몸의 노화를 반갑게 맞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중년’이라는 세월의 마디 하나를 더 늘려서 정말로 ‘노인’의 눈은 스무 해쯤 뒤에나 찾아오라고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사는 게 원래 늙어가는 일이라 한창때에 낯설기만 했던 늙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곧 모두의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말의 변화가 사실 늙음이 정말 내 일이 되기까지는 낯선 누군가의 일일 뿐임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휴가차 친정에 다녀온 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떠나기 전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들렀다가 상경하는 길이라 했다. 구십칠 세인 고령의 할머니는 몸도 부쩍 마르신 데다 막둥이 손녀인 내 동생도 못 알아보고 막내딸인 엄마만 겨우 알아보실 정도로 총기가 쇠하셨다 한다. 헤어질 때 할머니가 엄마 손을 놓지 않고 자꾸 따라나서려고 해서 엄마가 애처로운 마음에 눈물만 흘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를 뵈러 갈 적마다 매번 이런 일이 생기니 노모를 만나고 오신 날마다 나의 모친은 늘상 눈물 바람이다. 백세를 앞둔 호호백발의 노모 앞에서 엄마는 당신도 손주를 열둘이나 둔 일흔여섯의 할머니라는 걸 잊고 어린 딸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시나 보다. 이런 순간에 나의 노안이나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흰머리 따위를 어른들 앞에서 보일 생각을 하면 부끄러워진다.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어오는 환절기를 맞아 주변 어르신들이 부디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