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어린시절이다. 그만큼 공동체는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내 몸에 배어있다. 그러나 그 어린시절은 나 자신을 구성하는 개인적인 특별한 ‘기억’이라고만 생각했지, 사회사를 구성하는 ‘소재’로 재해석하지 않았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마을, 사회적 경제(호혜 경제), 식량문제, 에너지 문제 등을 공부하고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나 자신의 개인사가 사회사를 공부하고 재해석하는데 얼마나 훌륭한 소재인지를 절감하고 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충청도의 태안반도에 위치한 몽산리라는 시골이었다. 산업사회의 생산구조로 설명해 보면, 비화폐 영역이 여전히 살아있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 살줄 알았고, 자연에 의지해 사는 방식이 자연스러웠다. 땔감, 먹을거리, 옷, 집, 농사, 보육 등 생활의 대부분을 돈이 아닌 상호관계로 상호의존으로 해결하면서 살았다. 아랫집 동생을 업어 키웠던 기억, 자연 속에서 널려있던 다양한 식물들을 간식삼아 먹고 큰 기억(그때 먹었던 식물들은 지금 비싼 건강식품으로 팔리고 있음), 품앗이로 농사짓는 어른들을 보며 자랐다. 잔치 때마다 서로 나누어 먹기 위해 돼지 한 마리 잡으려고 모였던 풍경, 어린아이들은 그 옆에서 돼지오줌보 얻어 바람 넣어 그것으로 축구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어디 그뿐인가, 정말 멋진 사구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은 천혜의 놀이터로 아직도 마음속에 그대로 있다. 부모님은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처럼 끝없이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먹을거리들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었다. 요즘 이야기 하는 사회적 경제, 호혜 경제, 선물경제가 살아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아련하고 아름다웠던 어린시절 우리 마을의 풍경은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6학년 때(1976년)였다. 근데, 엄청난 생활 혁명을 가져다 준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마을에 살아있던 사회적 경제, 호혜 경제의 영역은 급격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마을에 농약 마시는 사람이 늘고, 가정 폭력이 빈번해지고, 무엇보다 품앗이 방식이 점차 사라졌다. 오히려 각자 노동시간은 길어졌고, 서로의 관계밀도는 줄어들었다. 우리들의 공유재산이었던 해변은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사유화 되었다. 그 주인들은 여름철이 지난 후 사유화된 해수욕장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철조망을 쳤고, 심지어 그 철조망에 전기를 흘려보내 동네에서 같이 자란 이웃집 어린 동생이 그 전기에 감전되어 죽었던 끔직한 사건은 아직까지 큰 상처로 남아있다.

그때부터 어른들은 자기만의 경제활동에 몰입했고, 어린아이들은 경쟁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가 산업사회의 경제구조가 시장과 국가로 재편되는 전환기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스스로 혹은 서로 의지해 해결하던 많은 것들이 차츰 ‘돈’으로 사야하는 ‘상품’이 되어갔다. 농사짓기에서 농약과 화학비료는 필수였고 부엌에서 맛내기는 화학조미료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마치『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 기둥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그 흐름에 빠져들었다. 그 흐름을 경제성장이라 불렀고, 그 행진은 기업과 정부의 힘이 커지면서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유럽의 모델을 이야기하면서 양극화된 사회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복지국가론을 펼치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사회적 경제의 싹, 협동조합의 싹, 선물 경제의 싹들을 너무나 쉽게 버렸다. 어느 시기부터는 기업과 정부가 나서서 사회적 관계를 너무 쉽게 해체시켜 상품 혹은 공적 서비스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사라지고, 그저 잠만 자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냥 레토릭이 되었다. 아이들이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돌아보면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는 두 가지 핵심역량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치력’과 서로 도우며 사는 ‘협동심’이었다. 결국 두 날개를 잃어버린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고 자기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벌어야 하는 악순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알아가고 있다.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 호혜적 관계의 소중함을.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탕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는 여전히 멀다는 것을. 무엇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치력과 서로 도우며 사는 협동의 두 날개가 소중함을.

이제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처럼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서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