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로, 일로 여러 아이들을 만나온 지 20년이 되어간다. 우리 집에 놀러온 한 후배로부터 단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이끌려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그 사이, 내 아이가 사춘기를 맞아 저도 힘들고 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좌절하여 상담을 그만 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아이를 통해 내가 겸손해지는 시늉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내려놓는 연습도 하게 되었다. 아이 때문에 속 썩는 부모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배로부터 상담수퍼비젼을 받을 때는 자존심도 상했지만, 가슴만으로 시작했던 일에 한계를 느껴 공부도 더 하게 되었다. 그냥 순간순간 열심히 진심을 다해 산 것 같기는 한데, 어느덧 내 주변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도 한다.

봄이 오고 있다. 두터운 오리털 파카, 겨우내 칭칭 둘러매던 털목도리도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겨울’인 사람들이 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상담을 온 아이, 학교?보호관찰소?법원에서 의뢰한 아이, 주변 이웃이 의뢰한 아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나를 만나게 되는 아이들은 아직 ‘겨울’인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아버지가 때려서, 인터넷 중독으로 학교생활을 잘 못해서, 비행을 저질러서, 너무 위축되어서…… 아이 뿐 아니라, 부모들도 이 아이들 때문에, ‘한 겨울’이다. 기온이 낮아 추운 날씨에는 옷을 두툼하게 입고, 난방을 하며 견디면 절로 봄이 오지만, 마음이 추워 ‘겨울’에 있는 사람은 누가 옆에서 도와주어야 ‘봄’을 만나게 된다.

이웃어른의 소개로 만난 초등학교 고학년인 한 아이가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형, 동생과 함께 사는 그 아이는 마른 체구에 귀티가 나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을 하고 사춘기의 형은 친구랑 돌아다녀서, 어린 동생은 착한 이 소년의 몫일 때가 많은 것 같았다. 어려운 형편에 형제들 중 가운데 끼어 버거워하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놀며, 시간을 보냈다. 좀 친해진 다음에, 부자가 되고 싶은 그 아이를 위해 우리는 부자가 되는 계획을 단계별로 세웠고, 실천해보기로 하였다. 한 번 통장에 들어간 돈은 꺼내 쓰지 않기, 부자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시간 관리하기를 목표로 정하고 실제 시간표도 그리고, 요일별로 시간을 쪼개어 책상에 붙어있기부터 시작했다. 부자되는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하고, 공부를 잘 하려면,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 있어야 된다고 분석을 했던 터였다. 지금도 공부를 곧잘 하지만, 중학교에 가기 전에 공부 습관을 잘 들이고 싶었던 아이는 내 말을 잘 따라주었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모니터링 하여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높은 목표보다 잘게 줄여서 만든 목표를 이루어내면서 아이는 표정이 밝아졌고, 눈맞춤이나 앉은 자세도 당당해지고 반듯해졌다.

상담을 종결하기 한 회기 전, 아이는 새 학년이 되면 지각을 안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하였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자명종도 없이 살아서 늘 지각을 했었단다. 학교에 가는 5일 중 네 번 쯤은 지각을 했었던 아이는 반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러려니 했었다는데 아이는 늘 부끄럽고 미안했었다고. 형네 담임선생님이 사주셨었다는 자명종은 고장이 났고, 늘 힘겨워하는 아버지에게 새 자명종을 사달라는 말도 못하던 그 아이가 종결하는 날, 기쁜 소식을 전했다. 개학한 이래 지난 일주일동안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명종도 없는데!! 그냥 일찍 눈이 떠졌다고 말하는 그 아이의 눈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종결 기념으로 아이를 위해 자명종을 사갔던 내가 “선생님이 자명종 괜히 사왔나보다, 혼자서도 잘 일어나는데……?” 하자, 아이는 “아녜요, 자명종 켜고 자면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도 먹고 갈 수 있을 거예요.”하며 신나하였다. 자명종 초침에 달린 크고 작은 비행기 그림을 보면서, 자명종 소리를 작동시켜보면서, 아이는 상담을 통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고, 이제 스스로 시간을 관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제법 논리적으로 소감을 말한다. 안쓰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 달 후의 추수상담을 약속하고 나오는 내 마음이 푸르다.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