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21

 

 

 

 

 

 

 

 

 

 

 

 

  성서연대 - 수필

 

목회컬럼 14 - 숙성의 열매를

 

 

 

 

 

 

 

 

 

 





이 준 우


목사
새샘감리교회
ch8131@hanmail.nete






 


코로나로 대부분 자영업자가 고전하는 시기에 권사님 가정이 떡집을 열었다. 기지떡 전문집이다. 그런데 떡을 만들어 내면 적지 않은 분량의 불량품이 나온다. 조금 터진 것, 팥앙금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 등이다. 그중에는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불량품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있다. 모양도 예쁘고, 팥앙금도 치우치지 않았음에도 불량품이란다. 발효와 숙성이 덜 된 것이라고 한다.

하나 먹어보니 확실히 식감에 차이가 났다. 충분히 숙성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들이라 폐기해야 한단다. 좀 싸게 팔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더니, 제품 이미지 때문에 안된다며, 제일 어려운 것이 발효와 숙성이라며 얼굴에 그늘이 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숙성이 필요한 것이 어디 떡 만드는 곳뿐이겠는가.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고 한마디 말, 한 줄의 글도 그렇지 않은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했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도 오랜 숙성의 결과물이리라.

때로는 가슴을 후벼파고, 때로는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때로는 세상을 이기게 하는 아니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쏟아붓는 설교자의 설교 역시 오랜 숙성이 필요한 고된 작업이 아닐까? 어쩌면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소비되어버리는 설교는 시간에 쫓기며 설교조차도 횟수로 승부하는 것같은 이 땅의 목회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감리교회 목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소속 지방회에서 연회 年會에 추천받는 과정이다. 당연히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심사를 받는다. 며칠 전, 추천심사가 있었다. 수련목회 과정에 있는 전도사인데, 심사 위원들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어 제출된 서류를 꼼꼼히 살펴봤다. 제출된 서류 가운데 심리검사 소견서 한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생각하기 전에 행동부터 하는 성향이 있음.” 지식인의 진수 眞髓는 행동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하기는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지식인은 실천 혹은 행동이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비판에 공감하며, 왜 지식인들이 그런 비판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많이 배웠으면, 많이 알면 당연히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살아 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현저히 적은 나이가 되어보니 나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앎이 소중하지만, 그 앎이 참이며, 진실이며, 팩트인지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지금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동 action이 꼭 필요한지, 정당한지 확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식자우환 識字憂患이라는 말처럼 많이 알기에 고민도 많았을 테니까.

‘거짓 뉴스’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다. 오죽하면, 거짓 뉴스 처벌법까지 거론될까? 표현의 자유 논란까지 일으키며 법제화하겠다는 정치인의 의도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심각한 문제라는 되는 공감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팩트를 품고 전파되는 과장 혹은 거짓 뉴스를 누가 명쾌하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

정보의 바다에 떠도는 속칭 찌라시는 제외하고라도 버젓이 각종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선동적(?) 기사가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그렇기에 어떤 기질의 사람은 무조건 불신을 보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기질의 사람은 피곤하기 때문일까 자신의 생각은 멈추고 언론매체가 내리는 결론에 쉽게 동의한다. 그리고 분노하며 함께 주먹을 휘두르고 정의를 위한 파르티잔처럼 환희에 빠져든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매도한다.

얼마 전, 실력과 인품, 인문학적인 소양의 설교로 매니아층을 형성한 어느 목사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읽었다. 그 내용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목사가 앞장서 목청을 높이고 환호를 끌어냈던 사건들이 후에, 거짓이거나 과장 誇張임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이나 사과 없이, 초월자처럼 정의를 설 說)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왜 뛰어난(?) 인물들이 그런 실수를 할까?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함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그리스도인, 더구나 목회자라면, 달려온 정보를 덥석 끌어안지 말고, 확인해보고 생각이 충분히 숙성된 후에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지하실에 신문을 쌓아두고, 십년 전 그날치 신문, 그래서 진위판단이 난 기사만 읽었다던 어느 인물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흐려진 기억탓으로 그 인물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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