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육 년 전의 일입니다. 시애틀 북쪽 바닷가 머킬티오에 자리한 안성진 목사님 댁에 머물며 한 여름을 났습니다. 그 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미주 이민 2세들의 영성 교육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던 일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릅니다.

때마침 아버지날이 되어, 작은 선물을 하나 사서 드렸더니, 기꺼이 받으시며 “내 큰아들이 주는 선물이니 얼른 받아야지” 말씀하셨습니다. 감은 듯이 실눈 뜨고 웃으시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른에게서 아들로 받아주시는 그 말씀에 가슴이 떨리던 감격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 자상하게 웃으시던 얼굴이 지금은 하늘에서 더욱 밝으실 것입니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 가셔서 사시던 안성진 목사님이 십여 년 전, 어느 주일에 예고도 없이 차선각 목사님과 함께 작은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멀리 계시면서도 늘 기억하시고 살뜰한 정으로 기도하시며 어린 아들 돌보듯이 사랑하신 뜻이 새삼 느껴졌던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모자람과 문제가 있는 사람도, 한 가지 장점만 보시며 사랑하시는 그 어른의 사랑 때문에 저는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도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가까이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강렬했겠습니까? 사랑을 가르친 것 뿐 아니라 실천하며 사신 힘은 그토록 강한 것이었습니다.

‘심동 안성진 목사님’, 생전에 부르지 않던 이름으로 그리움에 사무쳐 불러봅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사셨습니다. 민족 수난사의 한 증인으로서 이른바 만주에서 북한으로, 다시 한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나그네의 영성’을 몸소 사신 안 목사님은 가난하게 사시며 고생하셨으나 평생 동안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긴 일없이 사셨습니다.

아동문학가로, 설교가로, 명연사로, 목회자로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셨기에, 돈과 명예와 그 어떤 것도 얻을 기회와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고 물러나서, 다시 시작하시기를 평생토록 하셨습니다. 어린이를 도무지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 문화 속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열정으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심동 안성진 목사님의 강연과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함께 웃고 울며 감동을 받고, 힘을 얻었습니까. 그분의 글을 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일군 어린이 회관도 출판사도 그리고 개척하신 수많은 교회들도 일찍이 후배들에게 넘겨주시고 자유인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의 아호가 뜻하듯이 마음도 어린이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이 뜻을 흔히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감상적으로나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심동 선생님이 사셨던 것처럼, 그 뜻은 높은 분별의 지혜와 뜨거운 열정의 결단이 배합될 때만 그 실천이 가능한 것임을 인생을 살면서 수련하면서 지낼수록 더욱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가부장 문화와 남성 지배 문화에 길들여진 삶을 생각해도, 그 뜻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더욱이 이기심과 물질주의와 경쟁심이 팽배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심동 선생님이 걸어가신 길은 바로 용기 없이 갈 수 없는 길이요, 사랑과 진리를 온 몸으로 증거한 길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망 기사를 읽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비쳐지느냐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사람들에게보다 가까운 가족들에게 어떻게 경험되었느냐 하는 것이 더욱 더 한 인생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심동 안성진 목사님의 임종을 맞은 가족들의 사랑은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적시는 감동 드라마입니다. 모든 가족의 노고를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으나 몇 가지만 떠올립니다.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큰 외손자 외손녀 남매, 바이올리니스트 관빈, 피아니스트이며 철학도인 희경, 이들은 한 학기 휴학하고, 할아버지를 가까이 모시고 간호하였습니다. 막내아들 형남은 화가로서 붓을 내려놓고 지금도 일년 가깝도록 그림을 접었습니다. 나이 어린 가족들이 이럴진대, 서랑 이길송 장로를 비롯한 온 가족의 사랑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정말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들이, 그처럼 자녀 손들을 사랑하고 또 그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일이 명령으로 되겠습니까? 요청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평생토록 심동 안성진 목사님이 아호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치열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사신 열매라 생각하면서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얼을 기리며 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