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돌아갈 고향이 있으십니까? 어릴 적 꿈꾸던 고향, 타향살이에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가면 부모형제, 일가친척과 친구들, 모두가 웃는 얼굴로 맞아주던 고향, 그래서 다시 살아갈 이유와 힘과 용기를 주던 삶의 오아시스 같던 그 고향 말입니다. 저는 지금 그 고향이 희미해지고 사라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 어릴 적 느끼던 내 마음 속 고향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물음이 생깁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왜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을까?” 그 다음 절에 보면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지만, 왜 굳이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사회적 성서해석은 살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에서 답을 찾기도 하고, 안병무는 가진 것에 안주하지 말고 탈출하라는 실존주의적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에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에 도달했지만, 그 약속의 땅에서도 나그네처럼 거류했는데(9절), 그 이유는 그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15절), 더 좋은 곳, 곧 하늘의 고향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16절)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고향인 본향, 우리 생명이 태어난 한 처음 그곳을 바라보는 믿음은 이 땅의 삶에 그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멀고, 크고, 깊은, 저 우주의 끝, 아니 그 우주를 넘어 선 영원을 바라보고 있기에 결코 이 땅에 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좀 더 따뜻하고 풍요롭고 사랑이 넘치는 공간과 삶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본능 속에 새겨진 존재의 시원 始原에 대한 영적인 이끌림이라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입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이어져갑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나라는 개체는, 생명이라는 하나로 연결된 전 우주적 연합체에 속한 하나의 세포일 뿐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나를 통해 구현된 생명은 또 다른 형태로 연속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한 개체이면서 전체이고 혼자이면서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명은 변화를 되풀이하며 본향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러니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하늘 고향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티벳 불교의 모래 만다라 sanding mandala 작업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만다라는 우주의 원리를 상징하는 도형인데, 모래 한 알 한 알에 색깔을 입혀 설계도를 따라 쌓는 작업입니다. 신심 信心과 최고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의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소멸의식에 있습니다. 몇 년에 걸친 작업이 완성된 후에는 그것을 순식간에 흩뜨려 소멸시켜버립니다. 우리가 땅에 쌓는 것들은 곧 소멸될 것들이니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라는 거지요. 우리 눈은 모래알 같은 물질적 환상이 아니라 우주가 보여주는 진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죽음처럼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평생을 걸쳐 쌓아 올린 것들을 놓아버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떠나야만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놓아야만 얻을 수 있고, 죽어야만 새로운 단계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 천국의 문을 열어줄 열쇠는 바로 신앙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영적인 생명체입니다. 최소한의 물질 소비, 착한 노동과 생산, 평등한 분배, 민주적 시스템, 공동체를 위한 규칙들, 공동체원간의 사랑, 평화 만들기,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생명의 본능인 영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 이끌림을 외면하고 모래알 같은 물질적 욕구에 끌려갈 때, 생명의 힘은 철저하게 우리의 물질적 영역들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생명의 균형이 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문명의 극점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낸 화려함과 더불어 그로 인한 생명의 파괴를 보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태환경보다 더 큰 생명의 힘은 더 이상 인간 종 種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종말적인 재앙을 당하기 전에 빨리 하늘 고향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잃어버린 고향, 본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 즉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이 이번 추석을 지내며 얻은 저의 작은 깨달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