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방문 중에 남긴 메시지 가운데 가장 굵직한 메시지를 꼽으라면, 어쩌면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은 지난해 교황의 사목지침서 ‘복음의 기쁨’에서 명시적으로 밝힌 “진정한 평화는 정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부의 분배나 빈자들의 인권이 사회 통합이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를 재확인한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끊임없이 평화를 방패삼아 정의를 유보하려는 권력과 자본의 생리를 간파한 말인 것이지요. 겉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속은 여전히 비민주적인 지도자들, 자본의 이익을 우선하는 비정한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나라들에 대한 경고요, 거대한 화약고로서 세계의 근심거리인 분단 한국을 향한 근심어린 메시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대마다 성격은 다르지만 각기 살아 있는 권력은 사회 통합과 평화를 명분으로 억압을 일삼아왔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청계천 피복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시대에 권력과 자본은 우선 파이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하지, 분배 정의 따위는 나중 일이라며 노동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저들의 논리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이사야 시대에도 평화를 담보로 정의를 희생시키는 게 역사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사 32:16-17). 사람들은 광야처럼 살기 어려운 환경, 안보 위협이 팽배한 환경이나 시대에는 불가피 정의는 유보되거나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광야’와 ‘기름진 땅’을 동일하게 ‘정의’가 구현되어야 할 현실로 보았습니다. 정의를 평화의 결실로 보지 않고, 평화를 정의의 결실로 본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 없듯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에게서 정의는 인간의 영역이고, 평화는 신의 영역입니다. 정의가 인간의 정치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평화는 인간의 정의로운 행위에 대한 신의 보상입니다. 인간의 영역으로서 정의는 현재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억울함을 풀어주고,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불편부당하게 법을 집행하고,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 등은 모두가 정의를 실천해야 할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영역들입니다. 반면에 신의 영역으로서 평화는 미래지향적이고 추상적입니다. 정치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실제성과 추상성을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평화를 담보로 정의를 유보하는 것은 가상을 담보로 실제를 유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실제가 아닌 정치는 정치라기보다 유사 종교에 다름 아닙니다. 실제가 아닌 정치는 항상 기만적입니다. 무대의 조명과 음향과 잘 다듬어진 대사가 연극의 효과에 동원되듯이, 기만적인 정치는 정의에 대한 요구를 희화해 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정치에서 그런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흥행물이었음을 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연극은 끝났습니다. 연기자들은 더 이상 무대 위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저들에게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무대의 배경일 뿐이지 주인공은 아닙니다. 무대의 주인공들은 한껏 정제된 목소리와 효과를 동원하여 슬퍼하고 탄식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이어나지 않게 진실을 밝히마고 읊었습니다. 눈물까지 보이며 읍소하며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무대의 배경이 된 이들이 가상이 아닌 현실의 정의를 요구하며 발목을 잡으려고 합니다. 무대의 주인공들에게 진실을 직면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세월호 유가족들은 모릅니다. 기만의 가면을 벗는 일이 어찌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서 덮으려고 합니다. 다른 극으로 무대를 대치하려합니다. 그도 여의치 않으니 고금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나라의 안정과 민생경제라는 레토릭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다수 국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비난의 손가락을 그들에게 돌리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고 모욕함으로써 다중의 무관심 속에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의 각본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결정적으로 모르는 게 있습니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