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엡6:12).”

4.27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이하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DMZ 500km을 따라 50만 명의 인원이 손에 손을 잡고 민 民의 평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주춤거리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힘을 불어넣고 평화에의 의지를 다시 불러일으키자는 취지의 행사였습니다.

준비위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행사가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칫 여야의 정치적인 대립이나 진보 보수의 이념적 갈등으로 행사가 오염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DMZ 평화인간띠운동본부가 내건 공식 슬로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종교를 넘어, 국적을 넘어, 인종을 넘어, 모든 경계를 넘어, 다양성을 포용하고, 민 民과 민 民이 모두, 남과 북의 DMZ에서, 평화를 위해 손을 잡습니다.”

그러기 위해 보통 수많은 단체들이 연합하고 조직위원회가 꾸려져 하향식으로 행사를 조직화 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경지역의 도시나 마을이 주체가 되어 평화를 바라는 시민들을 초청하는 축제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 낼 수 있는가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평화 프로세스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민 民으로부터 출발하는 상향식의 평화운동을 지향했다고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최초 발의자인 철원 국경선 평화학교의 정지석 목사는 이 행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느냐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철원 지역 주민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경선 지역의 주민들은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었고, 분단에 따른 경제적 문화적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평화란, 지극히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미래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행사를 통해 많은 주민들이 평화가 실제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평화지대 형성이야말로 국경선 지역의 새로운 활로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원 군수부터 시작해서 지역의 모든 단체들이 움직였고, 교회들과 종교단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의식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순수한 민 民의 평화운동으로 이 행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늦봄학교 친구들은 남해에서 새벽 5시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각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정해진 곳에 모여들었고 손에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행사를 마치고는 또 부리나케 내려가야 했습니다. 해외에서도 참여한 이들이 있었고, 한국에 올 수 없었던 수많은 교포들이 해외에서 행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남북한 대사관을 연결하는 행사를 진행한다고 하였고, 전 세계 곳곳에서 손을 잡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때론 학교 운동장에서 또 때론 집에서도 손을 잡고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모두 힘들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제가 만난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치루려는 비용 Waging Peace이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운동은 동원된 인원의 숫자나 또 행사가 얼마나 짜임새 있게 조직화 되었나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만들려는 의지를 어떻게 현실화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지석 목사는 이것을 수년째 지속해온 매일 오후 3시에 소이산에 올라 드리는 기도회의 영성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합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대신 하나님의 평화를 채우는 영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대감과 미움으로부터의 자유, 자기 이익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평화에로의 변화가 그 출발인 것입니다. 이런 평화에의 의지가 갈등지역의 주민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날, 철원 평야 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아이스크림 고지 정상에서 멀리 평강고원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루미 도래지로 유명한 이곳은 몇 개월 전만 해도 군 초소였습니다. 캄보디아에서 평화활동가로 일하는 막스 에디가 Max Ediger는 베트남 전쟁에 군인으로 참여했다가 군복을 벗고 지금까지 동남아시아에 살며 평화활동을 펼쳐온 사람입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평화란 옆에 있는 이웃을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 만들기가 거대 담론이 아닌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바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영성운동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말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해무리가 선명한 무지개 빛깔로 축복을 보내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