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의 표지로서 ‘종’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종’의 본뜻은 ‘섬기다’ ‘시중들다’ ‘봉사하다’ abad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은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은 데서 유래합니다. 그리하여 이 말은 항상 두 갈래로 번역됩니다. 강압에 의해 섬길 때는 ‘노예’로 번역되지만, 자발적으로 섬길 때는 ‘종’으로 번역됩니다. 파라오를 섬기면 노예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면 종입니다. 세상을 섬기면 노예이지만, 주님을 섬기면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치열하게 종의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전9:27)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 가운데 두 가지 뜻을 내포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타자에 의해 속박된 내가 아닌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이 되었음이고, 둘은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불순종과 노예근성에 대한 연민입니다.

인간에게서 불순종과 노예근성은 뿌리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메시아의 노래)에서도 그 내력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도다”(사53:1-2).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미 역사 안에서 계시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결코 흠모하거나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왜 그런가? 불순종과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 8:33b)고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의 삶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은 ‘인간은 과연 자유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갈4:28-31). 인간은 뿌리 깊은 불순종과 노예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복음 안에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을 논증 재료로 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출산 불가 판단을 내리고,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육을 지닌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출산이 불가능했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한 집안에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이 자라게 됩니다. 이는 각 사람 안에 두 존재 즉 이삭과 이스마엘, 순종과 불순종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난 종의 아들이 주인의 아들을 구박합니다. ‘육체의 아들’이 ‘언약의 아들’을 구박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아들’(노예)이 아닌 ‘약속의 아들’(자유인)을 손들어 주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창세기가 이스마엘-이삭의 출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경우이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을 변경하거나, 첨가하거나, 뒤틀 수 없음을 경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개개인이 복음 안에서 자유케 된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유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지탱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어 밑바닥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사회’는 자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엄성, 인도주의, 생존권 등을 국가가 지향해야 할 임무로 삼고 밑바닥 사람들을 돌보며 일어설 수 있도록 합니다. 서구의 ‘복지국가’ 담론은 이런 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균형이야말로 공동체의 건강성을 담보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입니다. 돈, 권세, 명예, 가문, 학벌, 명품 등 세속의 높고, 힘세고, 번화한 것들을 구원의 징표로 삼았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이라면 위만 바라보던 눈을 아래로 향해야 합니다. 신분에 따라 고착된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갖가지 주문 呪文에 빼앗겼던 영혼을 되돌려야 합니다. 경쟁보다는 서로 협력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생명을 귀히 여기고, 살아 있는 생명들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