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선물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습니다. 장롱 속에 묻어둔 겨울옷, 구겨진 채로 둘러 입고 걷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좀 이르다 싶더니만 솜옷처럼 포근한 차림새가 더 든든해 보입니다. 물감 뿌린 듯, 샛노랗던 은행잎은 촉촉이 적시는 가을비가 몸에 시린 듯 도심의 아스팔트 거리에서 귀찮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금년도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봄볕 아래서 싹 띄우고, 여름 태양 아래서 땀 흘려 가꾼 결실을 창고 안으로 수납시킬 차례입니다. 모두가 넉넉한 마음이었으면 좋으련만, 농사짓는 사람들은 남는 게 없다며 한숨이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시절이 안 좋아 거둘 게 없다고 울상입니다. 그래도 누군가 간섭하는 사람 없고, 누군가 채근하는 사람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결실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내 인생은 어떤지? 언제나 습관처럼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이라고 아쉬워하는 입시생 같기도 하고, ‘아쉬움과 섭섭함 뿐’이라고 버릇처럼 후회하는 범부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빈자리를 채운다면 우리들 인생은 한결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는지. 정말 우리 삶에서 거둘 게 없다면, ‘시절 안 좋다’ 타박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뒤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암시적인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계시적인 희망입니다. 이는 지키고자 하는 자신이 부서지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을 넘으며 내 생애 단 한번이라도 나 자신을 하나님께 송두리 채 드리는 모험을 해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입니다.

주검예찬

설악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탄성입니다. 정상에서 시작된 단풍은 바람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와 남녘 하늘 아래 아늑한 계곡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나 노랗고 붉은 단풍 세계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토록 아름답다고 탄성 올리는 단풍은 지는 낙엽이요, 나뭇잎들의 시들은 잔해입니다. 한 여름의 무성함을 뒤로 하고 만료된 시효로 인해 떨어지는 주검인 셈이지요. 사람들은 만료된 주검의 찬란함에 도취합니다.

사람의 주검은 어떨까? 사람의 주검이 단풍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우지 못함은 아무래도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떨어지고 마는 것을. 부질없는 욕심으로 치장하고, 허울 좋은 입심으로 분칠하고 보니 역겨움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빈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이냐?”(마 11:7-8) 단풍이 좋다고 단풍 보러 떠나는 사람들은 단풍만 보지 말고 그렇게 떠밀려 살아가는 자신도 보았으면 합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살아가는 거리마다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절입니다.

멀리만 보이던 산과 들이
수정처럼 맑은 하늘 빛 받아
가까이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눈에 비친 세상은
소슬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기도 하고 적막한 밤의 벌레소리 같기도 합니다.

날마다 일상의 쳇바퀴에 매여
기계처럼 살아가는 저희들
귀 기울여 조물주의 음성 듣게 하소서.

눈으로만 보는 데 익숙한 저희들
녹슨 빗장 닦아내듯
정갈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귀로만 듣는 데 익숙한 저희들
그을음 닦아낸 등잔불처럼
맑은 영혼으로 낮은 곳을 향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