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선 비방과 무력시위로 뜨거웠던 휴전선이 남북당국자들의 만남으로 일단 평온을 되찾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설마 하다가 큰 불로 번지는 게 전쟁입니다.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입영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춘들의 군복인증이 무용담으로 온라인을 달구기는 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막기 위해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나무랄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가나안에 산재한 성들을 함락시킬 때입니다. 소문을 들은 그 땅 원주민들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궁지에 몰린 기브온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저들은 이스라엘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속임수로 화친을 맺을 계책을 세웁니다. 백성의 대표로 하여금 사신단을 꾸리고 마치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남루한 옷차림과 헤어진 전대, 말라비틀어져 곰팡이 난 떡을 지니고 적진 안 여호수아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소문으로 들었다며, 가져온 떡을 내밀며 화친을 청합니다. 여호수아는 의심하지 않고 그들과 화친을 맺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저들은 이스라엘이 치고자 했던 기브온성 백성이라는 사실이 탄로 납니다. 하지만 이미 화친을 맺은 터라 기브온성을 치지 못하게 되자 호전적인 병사들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허술한 정보로 전쟁의 진로를 결정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복자로서 만끽할 쾌감과 노획물 획득기회를 놓쳤으니 경솔하게 화친을 받아들인 이들은 영락없이 반역자로 몰리게 됐습니다. 여호수아는 난감한 처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일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을 죽이는 대신 가장 낮은 신분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나무패는 일과 물 긷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마땅히 죽일 수 있는 적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리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거짓말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여한 자신들의 맹세에 대한 책임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수 9:3-26).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립하게 되었을 때,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했느냐보다, 내가 그에게 어떻게 했느냐, 혹은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에 더 큰 책임을 지는 게 가능할까? ‘하나님의 정의’는 앞서 본 여호수아처럼 먼저 자신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불의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불의는 상대의 과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없는 과실까지 만들어 뒤집어씌우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남과 북이야말로 가장 큰 반면교사일 것입니다. 그동안 남과 북은 ‘7·4공동성명’, ‘6·15공동선언’ 등 실질적인 통일에 버금가는 큼직한 약속들을 해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선언한 ‘2007남북정상선언’ 2항은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했고, 3항은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이 두 약속만으로도 남과 북은 이미 평화가 정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대로 남북정상간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은 분명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은 ‘2007남북정상선언’ 4항과 관련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과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전적인 사람들, 권력과 이권만을 탐하는 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약속 따위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평화보다 전쟁이 더 남는 장사로 여기는 자들이기에 그럽니다. 민주국가에서 민간인 대통령이 군통수권자가 된 것은 전쟁이 본업인 군인들에게 전쟁 결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일 것입니다. 대통령이 군복을 입고 단호한 응징을 표명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유명무실해진 약속을 되살리는 노력일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속임수를 쓸지라도, 마지막까지 약속을 깨지 않으려는 편에 의해 불가능할 것만 같던 평화는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신뢰는 약속을 지키는 데서 무르익는 결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