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한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겨울이면 종종 ‘삼한사온’으로 말문을 여는 경우가 있지만 이제 기후변화로 약효 떨어진 말이 됐습니다. 대신 금년 겨울은 반갑지 않은 북풍한설이 한반도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소식입니다. 가뜩이나 걱정거리 많은 나라에 무거운 짐 하나가 또 얹어졌습니다.

올해는 연초부터 나라 전체가 미세먼지 뒤덮인 서울 하늘만큼이나 음울합니다. 거짓과 위선과 과욕과 망상의 잔해물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기에 그럽니다. 새해가 되었다 해서 이 모든 짐이 가벼워질 것도 아니고, 소멸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크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가계 빚이 사라질 것도 아니고,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더 많아질 것도 아니고, 정규직이 더 늘어날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교육환경이 더 좋아질 것도 아니고, 가난한 이들의 삶이 더 나아질 것도 아닙니다. 물론 기울어진 저울추가 저절로 균형을 잡을 것도 아니고, ‘헬조선’이 갑자기 ‘헤븐조선’이 될 것도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변할 것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각성할 것도 아니고, 재벌들이 탐욕을 버릴 것도 아닙니다. 영혼 없는 공직자들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권력기관 사람들이 약자를 먼저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성직자들은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희망을 말하는 이들의 낯빛이 마치 빛바랜 사진첩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짐작하건데 그 많은 사람들이 유별나게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길을 나선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온몸에 파고드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모두가 희망이 고갈된 시대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인파가 새 ‘해’를 보겠다고 동해로, 서해로, 산봉우리로 올라가지 않고 광화문 ‘광장’으로 모인다면 훨씬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 희망이 고갈된 것은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태의연한 시대의 기류가 사람들의 숨통을 옥죄기 때문입니다. 가증한 것들이 성스러운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제도가 탐욕의 하수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최고 권력만을 추수하는 비굴한 군상들 때문입니다. 이걸 외면하고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자기를 초월하는 비상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희망이 고갈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표상을 봅니다. 이사야는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의 종’을 불러내고 있습니다(사 49:1-6). 새날을 열기 위해서 자기를 초월한 ‘종’을 불러낸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의 증언자로 부름 받은 세례 요한도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요 1:23). 그것도 한번 울리고 사라질 무형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비상한 자기 초월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을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죄수’(엡 3:1)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방인을 위해서 ‘예수의 죄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자기 초월의 결정판입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 상류 가문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까지 지닌 사람입니다. 어디를 보나 결핍 없는 삶이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위해 죽는 걸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영광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자기 초월의 열정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두 축인 로마제국과 유대교를 향해 감히 도전장을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희망이 고갈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좌표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물웅덩이는 말랐어도 지하 어딘가는 거대한 수맥이 흐르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걸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각자가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먹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힘을 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이 고갈된 세계에서 각자 자기만 살려고 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초월의 정신이요 신앙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이 많아야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