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젊어서 만주로 들어가 돈을 좀 벌어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짓고 정미소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앗간 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구두쇠였습니다. 수채구멍에 밥풀 한 알만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아도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내게 일을 시키셨습니다. 정미소 뒤쪽으로 쏟아지는 왕겨를 모아 자루에 담게 하셨고, 못자리에 들어가 피를 뽑게 하셨습니다. 김장 갈 텃밭에 우거진 풀을 매게 하셨고, 제법 먼 길을 오가는 물지게도 지게 하셨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이것이 아버님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버님 앞에서는 동화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책이라는 것은, 나중에 장가들어 애낳아 다 키워놓고, 늘그막에 대청에다 돗자리 펴고, 목침 베고, 다리 꼬고 누워서 보는 책이니라.”
‘삼총사’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변명조차 나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쟁통에 여동생 둘을 한꺼번에, 하룻밤 사이에 잃고부터 아버님은 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약주를 자주 드셨습니다. 정미소도 팔았습니다. 이사를 하고, 나는 기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정례와 나는 늘 붙어다녔습니다. 전학한 내가 어리둥절 서있을 때,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힌게 정례였습니다. 정례는 그 마을 방앗간 집 딸이었고, 우리 집은 정례네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정례와 나를 두고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정례는 나보다 한 살 위였습니다. 그러나 정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아이도 같은 반에 여럿이 있었습니다.
“야, 강정규! 너 이리 와.”
어느 날 그 나이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변소 뒤에서 불렀습니다.
“이거 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데 나정례한테 전해주라.”
그 아이가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내주며 말했습니다.
“뭔데?”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빨리 주머니에 넣어. 그리고 이거 너 줄께.”
그 아이는 다시 조끼주머니에서 ‘덴찌’를 꺼냈습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아이들이 덴찌라고 부르는 그것은, 미군들이 쓰다버린 폐건전지에 꼬마전구를 연결한 손전등이었습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응.”
“공짜루?”
“그래, 그리구 그것만 정례한테 전하면 돼.”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덴찌라는 것만 가지면 게도 잡을 수 있고 새도 잡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닷가 개펄엔 갖가지 게들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밤에 등불을 켜들고 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석유등불은 바람에 꺼지기 일쑤였습니다.
초가집 처마 끝에는 새들이 살았습니다. 처마 끝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깠습니다. 처마 끝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덴찌불을 들이대면 새들이 눈이 부셔 날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어미새도 잡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덴찌는 쓸모가 많았습니다. 밤중에 뒷간에 갈 때도 좋고, 무엇보다 꼬마전구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이리저리 흔들면 노름하다 오줌누러 나온 어른들이 호랑이가 나타났다며 도망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나는 그 덴찌를 꺼내들고 마음대로 놀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어디서 났느냐고 아버님이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뒷간에 들어가 그 아이가 건네준 봉투를 조심조심 뜯어본 나는 더더욱 곤란해졌습니다.

‘보고시픈 정녜씨,
다르미아니라, 여내를 하자는 거십니다.
정삼석 올님’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글씨는 삐뚤삐뚤, 받침도 틀려있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이불을 쓰고 덴찌불을 켜고 놀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아무리 매만져도 꼬마전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학교에 갔습니다. 쉬는 시간에 삼석이가 나를 불렀습니다.
“그거 줬냐?”
“아니.”
“왜?”
“내일 줄게. 아니, 오늘 집에 갈 때 줄께.”
“꼭!”
그러나 그 날도 나는 정례한테 편지를 전할 수 없었습니다.
“너 무슨 걱정있니?”
집에 오는 길에 정례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기운이 없니?” “덴찌 때문에.”
“덴찌?”
“응, 삼석이가 줬는데 불이 안들어와.”
“덴찌를 그냥 줬어? 공짜루?”
“아니.”
“그럼.”
“이거······.”
“이게 뭔데?”
“아무 것도 아니라구, 너 주라구······.”
나는 그제야 편지를 꺼내주었습니다.
이튿날 삼석이는 ‘특무상사’에게 불려가 매를 맞았습니다. 특무상사는 담임선생님의 별명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삼석이가 절뚝거리며 걸어왔습니다.
“야, 강정규!”
“······.”
“늬가 특무상사에게 일렀지?”
“······.”
“임마, 내 덴찌 내놔!”
“불이 안들어와.”
“내놔 봐!”
삼석이는 내가 건네준 덴찌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너 남의 물건 베려놓고 어떻게 할 거야, 응?”
“······.”
“물어 내, 건전지 값하구 다마 값하구 얼만지 알어?”
“············.”
“내일까지 5백환 가져와, 알았지?”
“······.”
그때 시작종이 울렸습니다.
나는 5백환은 커녕 5십환도 없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그냥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덴찌 값 내놔!”
삼석이가 손바닥을 폈습니다.
“······.”
“너 남의 물건 값 떼먹을 거야? 내일 이자 붙여서 7백50환 가져와! 알았어?”
이자는 금세 원금의 배가 됐습니다. 그리고 발길질까지 보탰습니다. 나는 삼석이가 무서웠습니다. 나중엔 학교가 무서웠습니다. 결국은 결석을 했습니다.
산 속을 헤집으며 놀다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례도 함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정례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버님의 주머니에서 차비를 훔쳐가지고 할머님댁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정거장에서 내려 고개를 넘다보면 방솔나무 아래 조상님들 산소가 보였습니다. 그곳을 지나면 곧 할머님댁이 있는 고향마을이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