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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까 벽장에다 치우신
빨·주·노·초·파·남·보는 뭐시다냐?“
나는 자발떨며 재우쳐 묻는구나.
그러자 점순이년 하얗게 눈 치뜨고
아예 입을 봉하더니,
앵돌아 앉는구나.
“아니다, 점순아!
내 입이 초사로다
나중에 알아도 되니
제발 입 좀 열려무나.”

아따 참, 시러배자석!
참을성도 딱이 없네.
지가 금방 청해 놓고
지가 먼저 입 막으니
입이 있어 말을 할까.
이 아니 곤란하냐?
그동안 보고서도
아직도 모르는고?
한라산 백록담과
백두산의 천지 물결
금강산 사계절과
지리산의 구름 바다,
한강, 대동강 부벽루
시 짓다 말 막히고,
짝뿔황소 코뚜레며
벽에 걸린 콩메주며
통통 여문 옥수수 자루 주렁주렁…….
밭 매는 아낙네며
제기 차는 아이놈이며
석양녘에 소 몰고 오는
지게 진 남정네며
감나무에 짓는 까치,
아기 업은 아낙네며
등에 업힌 얼뚱아기,
대장간, 대장장이 뚝딱!
무논에 쟁기질 워, 워!
처마 밑에 제비집
잠자리 물고 온 어미 제비
찢어진 입이라고
짝짝 벌린 아기 제비
수십 미터 이어 그린
명사십리 해당화요,
낙동강 칠백리라 …….
먹물에 물든 인생
그 사이 50년이
오가는지 모르는 새
살같이 지났고야.
그렇게 그리고 그려
쌓이고 쌓인 그림들,
뉘 눈에 띄었는가
소문에 입소문 타고
찾는 이, 사가는 이
전람회도 열게 되고
팔리는 이 명인이다
명인이 된 그 값으로
성 다른 딸 가르치고
그림 판 그 돈으로
성 다른 아들들 키워내니
여기저기 장성하여
시집가구 장가가구,
아들 딸 낳다보니
손자 손녀 달고 오네.
목사님 나고
신부님도 나고
절에 스님 나고
교수에 법관에다
치과의사, 유치원선생
성 다른 만큼 되는 것도 가지가지
일년에 한 차례, 오늘이 바로 그날
우리 정암 선생, 생신이렷다!

생일잔치 끝나는가,
할아버지 벽장문 열고
물감 접시 내려 놓으시네.
그 많은 제자 중에
화공 아니 없겠는가?
크고 작은 접시에다 물 부어
굵고 가는 붓
적시는구나.

그러니까 이제 그림을 그리는데
한 사내 나앉아 팔뚝을 걷는구나.
한 사내 나앉아 물감을 타는구나.
빨·주·노·초·파·남·보
크고 작은 접시에다
물감 짜서 개는구나.
빨강, 노랑, 파랑에다
주황, 초록, 남빛이라
한 사내 나서더니
저고리를 벗는구나.(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