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여는 ‘고갱(Paul Gauin 1848-1903 프랑스) 전시회’에 갔었다.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라는 멋있는 제호가 걸려 있었다. 그의 걸작품 <설교후의 환상>, <황색 그리스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가는가?>라는 작품을 보았을 때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림이 큰 벽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 까지 한 눈에 볼 수 있게 그려놓았다. 화가의 인생관과 철학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이란다.

그런데 그 옆에 고갱의 자화상이 아홉 점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낙원이 아닌,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 화가라는 말을 듣고 있는 고갱은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 중에 <황색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1891)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자기 얼굴을 중간쯤에 도드라지게 떡하니 그려 놓고, 뒤 배경으로 황색그리스도 상을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 찌그러진 얼굴이 또 하나 있었다. 분명 두 눈과 코, 입이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얼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같이 보고 있는 딸은 그 배경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이지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나도 전에 내 속에서 그런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목회를 할 때, 잘 해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런데 교인 중 한 사람이 내가 글 쓰는 실력이 없고, 사무적인 일처리도 못한다고 하면서 하는 일 마다 트집을 잡고 괴롭혔다. 자기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것처럼 유세를 떨었다. 나는 참 난처하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교인들이 그 사람 성격이 원래 그러니 참으라고 해서 참으면 되는가보다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런 질책을 계속 받다보니 내가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지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예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도하면서 본 얼굴이 그림과 닮은 이지러져 있는 내 얼굴이었다. 나는 내 영혼이 황폐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나를 추슬렀다. 이 일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일인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언제나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말고, 당당하게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큰 교훈을 내게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이지러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신호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성찰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다른 사람이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고통 속에 있었는데, 지금은 나 스스로가 못마땅하게 나를 볼 때가 더 많다.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게 굴 때나, 별 일도 아닌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를 큰 일 인 것처럼 과장하는 나를 보면서, 나를 괴롭히던 그 교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느낄 때가 그렇다.

고갱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이지러진 모습을 그렸을까? 고통스럽다는 외침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못난 면도 내게 있다는 고백이었을까? 그 얼굴을 그린 곳이 화로라는 것은 나중에 설명을 보고 알았다. 그는 왜 하필 불을 담는 화로에 이 얼굴을 그렸을까? 자신의 작품이 명상으로 감상되고 경험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고갱은 이지러진 자기 얼굴 옆에 ‘황색 그리스도’도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십자가 위에서 노란색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예수! 고갱은 자기에게서 예수가 빛나고 있다는 것도 안 것이 틀림없다. 그림 제목도 그렇고, 황색 그리스도가 훨씬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많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자신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고 낙원을 그리고 싶었던 사람, 그의 바람이 내게도 불어오면서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게 확 트였다.

그 그림은 백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내가 느끼는 고통과 희망을 그도 느끼고 살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시공을 초월해서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제는 이지러진 얼굴은 가끔 보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이 작은 그림에서 할 줄이야.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는 나를 보고 딸이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