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의 전령들 사이에서 또 다른 의미로 봄을 전해주는 꽃이 있다. ‘Lent Lily(사순절 백합)’라고도 불리는 수선화인데, 사순절이 시작될 무렵 피었다가 부활절이 지나면 지는 부활의 작은 증인이다. 3·1운동 백 주년을 맞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기증유물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에서 1919년 3월의 봄을 전했던 한 이웃의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딜쿠샤는 3·1운동을 세계에 전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살았던 집이다. 종로구 사직터널이 지나는 언덕배기에 오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권율 장군 집터) 바로 옆에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서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그간 십여 가구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쪽방촌으로 사용되던 딜쿠샤는 2006년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아들 로버트 테일러가 어릴 적 살던 집을 수소문하여 집의 위치를 확인한 것이다. 지난해 테일러 가족이 기증한 1,026점의 유물을 통해, 그동안 숨겨져 있던 딜쿠샤와 테일러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앨버트 테일러는 조선에서 부친에게 물려받은 금광업을 하면서 무역상회를 운영하던 사업가였다. 여느 서양인과 다르지 않던 그는 AP통신 임시특파원을 맡으면서 조선을 새로운 의미로 마주하게 된다. 3·1만세, 고종의 국장 행렬, 3·1운동 관련자의 재판을 취재하고 보도하였다. 특별히 1919년 2월 28일, 3·1운동을 하루 앞두고 태어난 아들 로버트는 삶 자체가 3·1운동의 증인이다. 그날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 일본경찰에게 등사기를 압수당하게 되는데 간호사들의 기지로 아기요람에 독립선언서를 숨길 수 있었다. 운명처럼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앨버트는 이를 서방에 타전했다.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언더우드(H. H. Underwood, 원한경)와 현장에 가장 먼저 찾아가 취재한 것도 앨버트였다. 그 참상을 알렸을 뿐 아니라 조선총독에게 재발방지를 다짐받기도 하였다. 그가 보관하던 태극기, 독립선언서, 고종 국장 행렬 사진, 신문기사, 편지 등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혀 뜻밖에도 전시회장에 감리교신학대학교 사진이 있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서양인을 감금하고 추방시켰는데 그때 앨버트가 수용된 곳이 사우어하우스(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라는 설명이다. 앨버트의 아내 메리의 회고록『호박목걸이 Chain of Amber』에 “형무소와 그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라는 기록이 단서가 되었다. 전시회에는 『호박목걸이』 초고와 함께 딜쿠샤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테일러 가족의 앨범, 옷, 식기, 소장품, 메리가 그린 조선인들의 인물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인도 북부를 여행하다 본 ‘딜쿠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정초석에는 “DILKUSHA 1923, PSALM CXXVII.1(딜쿠샤 1923, 시편 127:1)”이라고 쓰여 있다. 테일러 가족은 1924년부터 추방당하던 1942년까지 여기서 살았다. 앨버트는 미국에 사는 동안에도 늘 ‘집’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고, 유언대로 양화진에 묻혔다. 그리고 2006년에 아들 로버트가 그리던 집을 다시 찾았다. 66년 만에 노인이 되어 집에 돌아온 아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주인을 기다려온 집. 뭉클한 상봉이었다.

로버트도 2015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딸이 유해 일부를 양화진에 있는 앨버트 테일러 묘와 딜쿠샤 옆 은행나무 아래에 뿌렸다. 은행나무 언덕에서 묵묵히 역사를 지켜본 딜쿠샤는 이제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올해 하우스뮤지엄으로 개방을 앞두고 있다. 비록 테일러 가족은 딜쿠샤에서 함께 광복을 맞지는 못했지만 함께 봄의 언덕을 기다리던 푸른 눈의 증인이었다. 테일러 가족은 왜 그토록 집을 그리워했을까? 왜 조선에 묻히길 원했을까? 찾아야 할 조각들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딜쿠샤와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이 따스한 온기로 살아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