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 시린 햇볕에 따살따살한 기운이 감돌고 겨우내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땅이 녹신녹신 풀려 가면, 지난 가을 싹을 틔우고 꿋꿋이 버텨 온 냉이와 꽃다지가 차츰 차츰 자라기 시작합니다. 나무로는 생강나무가 제일 앞서 노오란 꽃을 피웁니다. 지천이 점점 푸르러집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때(5월 말)에는 아까시나무에 흰 꽃이 조롱조롱 달립니다. 꽃냄새를 담은 꽃바람이 한 번 휙 불어오면 굽어진 마음결이 살살 펴지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까시 파마를 하고 꽃을 따서 뒷꼭지를 똑 떼어낸 뒤에 꿀을 쪽 빨아 먹고는 “음~ 맛있어!” 조금 있으면 학교 뽕나무에서 오디가 떨어져서 그걸 먹은 아이들 입술이 까매질 터입니다. 생명은 이렇게 때를 알아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고 함께 나누며 삶을 이어갑니다. 어질고 굳세게.

아이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안에 제 삶을 건강하게 꾸려갈 힘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놀고 일하고 뒹굴고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싸우고 화해하면서 아이들은 삶을 배웁니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보통 뭔가 새로운 걸 배우게 되면 기대에 차서 흥분합니다. 내 앞에 있는 요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직접 부딪혀가며 배우려는 의지가 대단하지요.(영혼에 상처 입은 아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배움의 욕구는 깊은 곳으로 또 넓은 곳으로 확대됩니다. 아이들은 자기 내면의 존재와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망에 대해서, 또 이 사회와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 바로 보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이 제 나이만큼 몸과 마음이 자라려면 그 스스로 자기 삶을 충분히 겪어나가야 합니다. 기쁜 것, 좋은 것, 재미난 것, 성공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힘든 것, 고된 것, 쓰라린 것, 실패할 수 있는 것까지. 함께 하는 어른들의 역할은 키 큰 농작물이 쓰러지지 않게 옆에 기대어주는 지주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농작물이 병에 안 걸리게 하겠다고 농약을 뿌려대면 결국 그 자신의 면역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처럼, 아이를 보호한답시고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할 몫을 빼앗아가서 아이의 힘을 꺾으면 아이는 타성에 젖고 맙니다. 그런 아이는 몸이 아무리 자라도 어른이 되지를 못합니다. 요즘에 다 큰 청년들도 대학이나 일터에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의 엄마가 쪼르르 달려와 대신 말해준다고 하는데, 이러다가 이들 엄마 세대가 끝나고 나면 누가 판단하고 결정을 짓고 행동을 할는지요.

배움터는 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기운을 마음껏 분출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자치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는 볍씨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입니다. 자치성은 단발에 그친 일회적인 특별 이벤트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상의 모든 부분-관계를 맺고 생활을 챙기고 학습을 해나가고 일과 쉼과 놀이를 조화로이 하는 것과 같은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자기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전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결정하고 실행하고 책임지는 일, 학교의 살림을 고민하고 운영하는 일들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볍씨 아이들은 해마다 위원회(학교 살림과 문화의 영역들을 책임지는 단위. 올해는 서로 돕는 문화를 만들고 봉사를 실천하는 ‘너나들이’를 비롯해서 ‘자연튼튼부’ ‘난 알아요’ ‘되살림’ ‘요리 위원회’ ‘추억의 볍씨사진관’ ‘노는 아이들’ ‘책이랑나랑’이 있음)를 새로 구성해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5월 중순께면 볍씨 앞마당에 스무 동 가까이 되는 갖가지 모양의 텐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섭니다. ‘자치들살림’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자치들살림은 1학년 꼬맹이부터 6학년 큰 언니들이 섞여 한 모둠을 이뤄 3박 4일 동안 진행하는 캠프입니다. 근데 자치들살림의 ‘자치’의 핵심은 이 3박 4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은 자치들살림에 앞선 한 달 남짓한 기간입니다. 아이들은 틈틈이 모여 모둠을 어떻게 구성할지부터 시작해서 3박 4일을 위한 온갖 얘기들을 합니다. 모둠 이름은 뭘로 할지, 모둠 기운을 높여줄 구호는 어떻게 할지, 자치들살림 동안 뭘 먹고 살지, 무얼 하며 어떻게 지낼지.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까지 배워 온 생태적인 가치들을 생활 속에 녹여내고, 친구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갈등을 풀어가고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내년 이맘 아이들은 또 훌쩍 자라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