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여행기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으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의 눈에 비친 저 옛날 중국의 옛 모습이 마치 신선들의 세계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훌륭한 여행기가 있습니다. [열하일기]입니다. 조선 선조 때(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 만수절 축하사절 가운데 개인수행원으로 참가한 연암 박지원이, 장장 6개월에 걸쳐 중원을 여행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유려한 문체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열하일기]에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중원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 보는 말이 있는데, “자네, 이번 여행에서 제일 장관이 뭐였든가? 하나만 꼭 집어 말해주게나.” 그러면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하기를, “요동 천 리의 들판이 장관이야.” “큰길가의 저자와 점포가 장관이지.” “산해관이 장관이지” 하거나,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장상과 대신 등 모든 관원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선비와 서민들까지 머리를 깎았더군. …머리를 깎았으면 곧 오랑케요, 오랑케는 개돼지나 마찬가지이니, 개돼지에게 뭐 볼 게 있겠습니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연암은 그런 자들을 향해서 일갈합니다. “나는 비록 삼류 식자이지만 감히 말하리다.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 덩어리에 있다.” 중국의 참 모습은 웅장함이나 번화함에 있지 않고 깨진 기와조각이나 똥일지라도 요긴하게 쓸 줄 아는 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을 때 구경거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광야로 몰려가서 요한을 보고 와서는, “밥도 안 먹는대.”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산대.” “약대 털옷을 입고 있더구먼.” 이런 식이었습니다. 정작 요한이 왜 회개하라는 것인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요한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무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도 아니면 비단옷 입은 사람이냐? 비단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7-8)

우리는 어떨까요? 번화한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제법 잘 믿는 줄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고민 없이 믿는 이들입니다. 어디 가면 은혜가 차고 넘친다 하는 소문에 귀가 밝은 이들이 있습니다. 제 마음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누가 은혜를 많이 주나, 그런 욕심만 부립니다. 연암의 표현대로라면 모두가 겉모양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잠언의 말씀입니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잠4:1). “주의하라”는 ‘집중하라’로 읽혀집니다. 지혜를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집중해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오랜 세월 축적된 삶을 ‘들음’으로써 체득한다는 용법입니다. 지혜는 시간의 역사를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 일이, 과거와 미래가 연결돼 있음을 깨달음이 지혜의 시작인 것이지요. 누구에게 지혜를 듣는가? ‘아비’에게서 듣습니다. 물론 지혜를 들려주는 스승인 ‘아비’를 말합니다. 지혜는 아비에게서 자녀에게로 전승됩니다. 이 전승 가운데 우리가 살아야 할 신앙 유산이 있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기억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나간 세대와 오는 세대가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로 이어집니다. 듣지 않으면 신앙과 삶은 단절됩니다. 역사가 단절됩니다. 세대 간의 단절이란 ‘기억의 단절’이요, ‘역사의 단절’입니다. 기억이 없으면 매사가 뒤죽박죽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는 없고 갈등과 다툼만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처럼 기억의 단절이 심각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서신은 하나님의 사랑 역시 기억의 산물이라는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고.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낸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자각한 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교회마다 모양은 열심인데, 오래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없이, 각기 제 욕구로 펄펄 끓는 사랑이라면, 하룻밤 연정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을 위해 헛힘 쓰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