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제주 130일에 이어)

‘공든 탑이 무너지랴.’ 이 말에 별 의심을 않고 살았었는데, 제주에서 지낼 때 아이들과 저는 때때로 공든 탑이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더랬습니다. 상황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선흘리 마을에 오롯이 자연에서 온 재료들만 가지고 손수 집을 짓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다는 게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일이던가요? 혼자 마음만 키워 오시다가, 때마침 아이들이 마을에 들어와 함께 집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린 두 달 가까이 아침 일찍 일어나 가마솥밥을 지어 먹고는 바로 나가 일을 했습니다. 정오를 지나 1시까지. 그동안 제일 많이 한 일은 흙과 돌을 쌓아 올려 벽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머리 크기만 한 돌을 나르고, 딱딱하게 굳은 황토에 물을 부어 괭이와 삽으로 개고 옮기고. 이 모든 일이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맨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엔 일이 익숙지가 않으니 힘에 부치고 일하는 속도도 무척 더뎠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일이 영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며 막막해 했습니다. 마음을 도닥이기도 하고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지혜도 모아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 힘이 붙고 근육이 단단해져서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양이 늘어갔고, 힘든 일을 함께 하며 서로 간에 호흡도 점점 잘 맞아들어 갔습니다. 그러더니만 5월 하순께-원래 예상보다 좀더 이른 시기-에, 우리는 벽체를 모두 쌓아올릴 수 있었습니다. 일을 다 마친 순간,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벽체 맨 윗줄에 모여 앉아 기념촬영도 하고, 아주 기쁜 날을 보냈지요.

그런데 아뿔사. 벽체를 완공한 지 3일 즈음 지났을 때입니다. 제주에 강풍을 동반한 비가 밤새 몰아쳤습니다. 한라산 부근의 강수량은 약 1,000mm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중산간 지역에도 270mm 정도의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우리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벽체가 절반 이상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물을 고스란히 받게 된 흙이 버티지 못하고 흘러내리면서 돌도 같이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들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찝찝하고, 계획 세워둔 일들이 틀어지게 될까봐 걱정스럽기도 하고.

우리는 이렇게 각자 갖고 있는 마음들, 고민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들이 한 차례 정리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상황이 서서히 더 명료하게 보였습니다. 아무리 속상해하고 한탄한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이전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을 또렷이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의 우리에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보니, 우린 우리 모두에게 집을 잘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 우리가 이 일을 나 몰라라 하면 함께 일했던 마을 어르신이 곤란해지신다는 점도 생각하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현재 상황을 좌절의 경험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는 과정으로 바꾸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우리들의 생활을 돌아보게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에 와서 몸도 마음도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것도 태풍 한 방이면 곧 허물어질 수 있겠구나. 우리들 각자의 성장 지점을 다시 한 번 잘 살피고 다지고 가자.’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구체적으로는 생활 흐름과 일정을 재조정했고, 일이나 배움 활동과 관련된 목표를 새롭게 설정했습니다. 바로 이튿날 복구 작업을 시작했고, 그 다음 주부턴 서로 엉겨 붙은 흙과 돌을 정리해서 다시 벽을 쌓아올려 나갔습니다.

전 아이들이 이 과정을 훗날에도 잘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계획하고 힘을 쏟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이 찾아오게 될 테니까요. 그 때 이 날의 고민, 이 날의 마음, 이 날의 선택이 ‘가장 힘든 순간조차도 긍정적인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있어 새 힘을 낼 수 있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도 같은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14년 한 해를 살다 보면 때론 예상하지 못했던, 또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을 맞이하시게 되겠지요. 그 때에 바로 그 일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삶의 비밀스런 지혜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가 진일보하며 더 행복해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