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이스라엘 아합(B.C.876-850)은 사악한 왕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름으로 나라를 부강케 하려는 의욕이 넘쳐났던 사람입니다. 마침 이스라엘 동북 지역의 작은 도시 라못 길르앗을 시리아에 빼앗긴 일이 있는데, 아합은 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유다와 연합해서 시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왕상 22:1-40). 이보다 앞서 아합은 국가 번영 전략으로 바알을 국가 신으로 섬기는 시돈과 정략결혼을 한 바 있습니다. 저 유명한 이세벨과의 결혼 말입니다. 그때 아합은 야훼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이 나라의 번영에 유익하다는 판단을 하고, 온 백성이 야훼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섬기도록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는 유다와 연합군을 조직한 것입니다.

아합이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B.C. 868-847)에게 출정을 독려할 때의 일입니다. 여호사밧은 한 발 물러서서 승리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선뜻 나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조급한 아합은 무려 400명이나 되는 궁중 예언자들을 불러 모아 신탁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예언자 시드기야는 철로 만든 뿔을 가지고 나와서, 이 뿔로 적을 무찌를 것이라며 왕 앞에서 승리의 퍼포먼스까지 해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사밧이 미온적이자 이번에는 재야 예언자 미가야를 불러 신탁하게 합니다. 이때 미가야를 찾아간 아합의 사신은 미가야에게 다른 예언자들처럼 왕이 기뻐하실 말씀을 해달라고 귀띔합니다. 은근히 알아서 하라고 미가야를 겁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직한 미가야는 자기가 환상으로 목격한 장면을 숨김없이 말합니다. 하늘 궁전에서 거짓말하는 영들이 아합을 꾀어 전사하게 만드는 모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왕을 능멸하다니! 동료 예언자 시드기야가 어찌 그따위 예언을 하냐며 미가야의 뺨을 후려칩니다. 노기 띤 아합은 미가야를 그 자리에서 투옥시킵니다. 전쟁의 욕망, 승리의 욕망이 진실의 입을 틀어막은 것입니다.

연합군은 마침내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호기를 부렸던 것과는 달리, 여호사밧은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고, 아합은 적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든지, 아합이 탔던 전차를 씻을 때에 개들이 와서 그가 흘린 핏물을 핥았다고 합니다(왕상 22:38). 신명기 역사가는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라는 해설을 달아놓기까지 했습니다. 한 나라를 호령하던 왕, 무소불위 왕의 마지막 가는 길 치고는 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영만이 아닌 악한 영까지 이용하여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게 신명기 사가의 역사관입니다. 아합에게는 분명 하나님께서 보낸 진실을 설교하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욕망에 불타는 그는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악한 영에 동화되어 거짓을 설교하는 궁중 예언자들의 말이 더 좋았습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닌 400명이나 되는 예언자들이 하나같이 자기 면전에서 승리를 예언했으니, 그는 듣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된 것입니다. 국회 청문회 때 드러난 고위 공직자들의 살아 온 방식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청와대 어른이 바라시는 바를 눈치껏 실행하는 재주가 남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국가조찬기도회라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듣기 좋은 소리 골라하는 건 아합의 궁정 예언자들이나 피장파장입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납치된 사람이 자신을 납치한 범인에게 동조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욕망의 노예가 되면 악한 영에게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4년 동안 감옥살이하다 막 출감한 사람이, 2층집 창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리자, ‘내 인생은 이렇게 비참한데 나를 비웃다니!’ 그 순간 뛰어 올라가 살인을 했다는 게 아닙니까! 얼마 전 인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세상을 향한 증오심이 악한 영이 춤을 추도록 한 것이지요. 아합은 분명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국익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현실주의자였고, 실용을 중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충성하며, 진실을 말하는 미가야 같은 존재는 참으로 골칫덩어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몰랐던 게 있습니다. 자기 열망이 너무나 커서 악한 영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