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신 이론생물학자 루드비히 폰 베르탈란피는 폭력(전쟁)의 근원에 대해 의미 있는 해석을 내놨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이 상징화의 능력에 있다며 전쟁의 근원이 이념 혹은 상징의 충돌이지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신이 된 심리학]). 재독 철학자 한병철 역시 유사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한병철, [타자의 추방]).

음울한 전쟁의 기운이 이 좁은 한반도에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추진 잠수함과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싸드 배치를 속전속결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당장 경제 보복에 들어가고, 점차 수위를 높여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안보 위기 때문에 싸드 배치가 필요하다는데, 중국은 한반도의 안보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겁박합니다. 이 좁은 땅 안에서 한?미?일 해양세력과 북?중?러 대륙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국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 끝이 어디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적에 대한 우리의 상징체계가 교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한 요인일 것입니다. 여기에 국가 안보를 절체절명의 생존문제로 의제화한 정략적인 애국주의가 스스로 불구덩이를 만드는 형국입니다. 적에 대한 절대화된 우리의 상징체계를 앞세워, 당장 적을 막기 위해 취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하며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탈란피에 의하면 적은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념과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대상입니다. 따라서 적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징체계를 바꿈으로서 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와 집권세력은 오직 무력에 의한 응징 한 가지 길로만 달려가는데 있습니다. 자멸적인 애국주의가 한반도를 불구덩이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탄핵정국이 가져온 대통령 선거도 끝났습니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 앞에는 나라의 운명을 가를 중차대한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경제, 교육, 복지, 안보, 노동, 환경, 인구, 빈부격차 해소 등 어느 한 가지도 화급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기대하고 싶습니다. 안보관이 분명하면서도 적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대선후보들 간의 주적 논쟁에서 표출된 것처럼, 안보 포퓰리즘에 편승하거나, 맹신에 가까운 미국 추종은 경계해야 합니다.

싸드 기습배치는 오늘의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돌아보게 합니다. 도둑고양이처럼 싸드를 배치하자마자 한국에 10억 달러 비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트럼프입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건 한국의 보수집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비용 청구에 조선일보는, “충격과 함께 배신감, 분노를 느낀 국민이 많을 것”이라는 논설을 싣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직접화법이 아닌 간전화법을 쓰기는 했지만, 보수의 아이콘 조선일보가 이처럼 미국에 대해서 과격한 표현을 쓴 것은 이례적입니다. “사드 배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주한미군과 유사시 미군 증원 전력이 들어오는 항만 등 전략 시설을 보호해야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주한미군 방어가 곧 대한민국 방어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부차적으로 사드 방어 범위에 드는 국토까지 보호된다는 전술적 이익이 있었다.”(2017. 4. 29., 조선) 사드 배치가 한국방어가 주목적이 아니었음을 조선일보가 실토한 것인데, 이보다 더 순진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싸드 배치로 인한 국론 분열, 중국으로부터의 경제보복은 약과일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정착과 통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미국의 협력 못지않게 중국의 협력 역시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중국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싸드를 막무가내로 배치함으로써 자기 발등을 찍고, 안보는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적은 단호하게 막아야 하지만 악마가 아닌 친구로 만드는 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적을 악마화하면 할수록, 악마의 주술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운명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지금 세계 최악의 화약고입니다. 새로 된 대통령이 적을 친구로 만드는 지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