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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라는 말을 한글 사전에서 찾아보면 ‘농사꾼들이 농번기에 협력하기 위하여 이룬 모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레는 여러 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오성 그룹’에서 펴내는 잡지 이름이기도 합니다.
오성 그룹에서는 ‘이웃 사랑’을 표어로 내걸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벽지 초등학교에 도서관 만들어 주기,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기, 양로원에 연탄이나 라면 등을 보내 주기 등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연중 계속되는 이런 일에는 ‘운동’이라는 말이 꼭 따라다니게 마련이고, 이런 운동은 두레 잡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매호마다 이런 운동의 취지문이 실리고 운동 실적도 광고합니다. 화보에는 여러 가지 사진이 실립니다. 벽지 초등학교에 수백 권의 어린이 도서를 책꽂이와 함께 기증하는 장면, 외딴 섬의 소년 가장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장면, 그룹 회장님께서 직접 양로원을 방문하여 노인들에게 손수 방한복을 입혀 주는 사진 등이 게재됩니다.
잡지사 건물은 전철 3호선이 지나는 옥수역 근처에 있습니다. 근래 새로 지은 건물 현관에는 ‘월간 두레’라는 간판과 함께 ‘이웃돕기 운동 본부’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철이 개통되고 인근 마을이 재개발 지역으로 고시되면서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구파발과 양재역을 오가는 3호선 전동차가 압구정동과 금호동 사이를 흐르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땅굴 속에서 빠져나와 잠시 쉬며 하늘을 볼 수 있는 옥수역 밑에는 시영 주차장이 들어서고, 주차장 주변에는 다방과 종합 카 센터가 생겼습니다.
지난해에는 근방의 바위산을 깨고 현대 아파트가 들어섰고, 지은 지 오래 된 집이 헐린 자리에는 4, 5층짜리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바위산 밑에는 미타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값이 오른 절터를 조금 떼어 팔아서 이 절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잡지사 건물도 준공되었습니다.
마을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새마을 수퍼와 옥수 쌀집, 연탄 가게와 순대국집은 애초부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나 새로 지은 건물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자가용이나 전철을 이용하여 압구정동을 자주 왕래합니다. 그곳에 은행이 있고 백화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옷차림부터 표가 납니다. 그들은 서로 소 닭 보듯 합니다. 전철이나 자가용을 이용하여 이곳의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들도 서로 소 닭 보듯 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돌이 아버지의 속생각은 좀 다릅니다.
두레 잡지의 편집부장인 돌이 아버지는 설날을 앞두고 상여금까지 받았지만 오늘 기분이 썩 좋지 못합니다. 방금 선물을 가득 싣고 여러 대의 자동차가 고아원과 양로원으로 떠났지만 기자들만 딸려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오고 기사를 써 오면 다음 달치 잡지에 넣게 되는데 그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움막집 할머니’ 생각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옥수역을 향하다 보면, 현대 아파트의 위용에 비하여 형편없이 초라해 보이는 블록 건물의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의 처마 밑에 루핑 조각과 천막 조각을 이어 가까스로 비바람을 막고 사과 궤짝을 뜯어 맞춘 작은 출입문이 있을 뿐인 움막이 하나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면 거기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움막집에는 허리 굽은 할머니와 손주인 듯한 소년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여름철이면 주차장 한 옆에 구공탄 화로를 내놓고 빈대떡을 구워 팔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겨울철에는 지하철 압구정역과 통하는 백화점 입구에서 엿을 팔고 있다는 것뿐, 그 이상은 돌이 아버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움막집에 손주인 듯한 소년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지난해 가을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야근을 하고 밤늦게 퇴근하다가 움막집 앞에서 소년을 만난 것입니다. 소년은 그때 움막집 앞에 나와 고추를 내놓고 오줌을 누고 있었는데, 돌이 아버지가 나타나자 황급히 움막집 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대낮같이 환한 달밤이었습니다. 낮에 어쩌다 그 앞을 지나다 보면 언제나 사과 궤짝 쪽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이후로 돌이 아버지는 이웃돕기 운동차 선물 싣고 떠나는 자동차에 취재 기자를 딸려 보내거나 그 기자가 써 온 기사로 잡지를 꾸미거나 그 일로 그룹 회장님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이나 신문에 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내 꼭 쇠고기 한 근 사 드리고 집에 가리라.’
돌이 아버지는 움막집 앞을 지나치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옥수역에서 전동차를 타고 압구정역에서 내렸습니다. 집찰구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현대 백화점 지하 통로가 이어집니다. 커다란 여닫이 유리문이 열려 있어 훈기가 도는 백화점 입구에는 오늘도 소년의 할머니가 함지박에 조각엿을 담아 놓고 수건을 머리에 쓴 채 앉아 있었습니다.
돌이 아버지는 엿장수 할머니 앞을 지나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전에 못 보던 광경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초가집까지 지어 놓고, 바닥엔 멍석을 깔아 놓고, 장대에는 ‘설맞이 잔치 마당’이라고 쓴 깃발이 매달려 있고, 한 쪽에서는 널을 뛰고, 한 쪽에서는 윷을 놀고 있었습니다. 상품도 쌓여 있고, 점도 보게 하고, 경품 뽑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술도 참 가지가지군.’
돌이 아버지는 가래엿 목판을 지게에 올려놓고 가위 소리를 내고 있는 한복 차림의 청년 앞에 섰습니다.
“엿 가락에 얼마요?”
돌이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작은 것은 오백 원, 큰 것은 천 원입니다.”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거기에서도 유리문 밖으로 엿장수 할머니가 수건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이 얼비쳐 보였습니다. 돌이 아버지는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