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07
|
|
|
|
|
||
|
|
10/2007 |
|
|
||
|
|
|
|
|
||
|
|
|
|
|
|
|
|
|
강정규 연재동화 |
|
|
|
|
|
||
|
|
|
|
|
|
|
|
||
|
|
강 정 규 동화작가, |
|
1. 순덕이네가 강마을 둠벙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서북청년단이 들이닥쳐 산아래 안동네를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고 불까지 지른 그 이듬해 봄이었다. 자고나면 판자울타리 바깥벽에 삐라가 붙어 있곤 했다.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진 먹 글씨거나 먹줄이 죽죽 그어진 붉은 글씨였는데 엄마와 아빠는 양동이에 물을 담아들고 몽당빗자루를 들고 나가 그걸 떼어내곤 했다. 물을 좍좍 끼얹고는 빗자루로 썩썩 문지르면 검붉은 물이 흘러내려 마른땅을 적셨다. 들판엔 전해같이, 그 전 전해와 다름없이 자운영꽃이 만개하여 작은 벌떼를 불러오고, 그 속에서, 마치 보랏빛 보료를 펼쳐놓은 것 같은 논바닥에서 아이들은 엉덩이에 풀물을 들이며 재주를 넘고 딩굴었다. 한쪽에선 이리 뛰고 저리 우르르 몰리며 공을 찼다. 그것은 돼지오줌통에 입바람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정례네 큰 누나 시집가는데 왜 우리집 돼지가 죽는대유?” 나는 내 앞으로 굴러온 돼지오줌통을 힘껏 걷어찼다. 닳아 헐거운 신발이 공보다 멀리 날아갔다. “그래야 늬 신발 사줄거 아녀?” 아침에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잔칫집에서 잔치국수며 부침개며 돼지고기까지 한 점씩 얻어먹은 아이들은 괜히 신바람이 났다. “저기 좀 봐봐!” 한 아이가 말했다. “워디?” “저어기, 사람이 소잖남?” “그렁게말여, 저 행길에 구르마!” 아이들은 한길 쪽을 바라봤다. 정갱이까지 걷어올린 무명바지와 동저고리 바람에 무명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다리를 저는 한 사내가 마차를 끌고 있다. 맨발에 검정고무신, 광목 치마저고리에 수건을 쓴 아낙네는 뒤에서 민다. 마차 위엔 이불 보퉁이며 솥단지 같은 살림살이가 실려있고 갓난아기를 업은 갈래 머리의 계집애 하나가 마차에서 너댓걸음 뒤쳐져 걸으며 이쪽을 보고있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그 애가 순덕이였다. 순덕이네는 방앗간집 창고지기가 되고 순덕이 아버지는 정례네 일꾼양반이 됐다.(정례는 순덕이 아버지를 꼭 일꾼양반이라고 불렀다.) 일꾼양반은 주로 방앗간집 물을 길어대고 마당을 쓸거나 장작을 패는 등 허드렛일을 도왔다. 순덕이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입학만 해놓고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온 몸에 부스럼이 나더니 영 낫질 않았던 것이다. 인근엔 병원도 약방도 없고 오일장에 나가 연고를 사다 발랐다. 연고라지만 요즘 같이 튜브 속에 든 게 아니라 짝도 맞지 않는 조개껍질에 담아 파는 싸라기죽 같은 거였다. 유황냄새가 독하게 났다. 순덕이는 씽씽했다. 엄마가 가위로 자른 뒤웅박머리를 하고도 학교를 잘도 다녔다. 하교시간이면 나는 벌거숭이가 된 채로 몸뚱이를 홑이불로 감싸고 순덕이를 기다렸다. 그 애는 오자마자 개다리소반에 교과서를 폈다. 그리고 그날그날 학교에서 배운 걸 내게 가르쳤다. 그런데 차근차근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 버럭 화를 내며 30센티미터 대자로 내 손바닥을 때리기도 했다. 그럼 나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 오동나무 가지 끝에 하얀 낮달이 걸려있었다. 때론 아무리 기다려도 순덕이가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매미는 앵두나무 가지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땡볕아래 옥수수는 텃밭에서 잘도 영그는데 나는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대청마루에서 홑이불을 감고 딩굴다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꼭 고치 같다!” 내 귀에 누군가의 입김이 스치면서 이런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잠결인데도 얼른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늬가 꼭 누에고치 같다구, 큭큭!” 순덕이의 둥글넓적한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리 비켜!” “선상님이 심바람시켜서 늦었다, 뭐.” 순덕이는 여느 날같이 개다리소반에 교과서를 펴며 말했다. 그제야 보니 홑이불로 감싸고 누운 내 모습이 정말 누에고치 같기도 했다. 이듬해 봄, 나는 드디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순덕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1학년 교실을 가라했다. 그래야 된다고 하셨다. 나는 볼 것 없이 앓아 누었다. 큰댁에서 할머니가 달려오시고,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는 그냥 2학년이 됐다. 그리고 지난 일 년 간 순덕이가 얼마나 꼼꼼히 가르쳤던지 나는 잘 따라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빵점을 맞게 됐다. 그것도 내가 가장 자신있는 국어시험에서. 높다 = 좋은 것 검다 = 나쁜 것 예쁘다 = 좋은 것 더럽다 = 나쁜 것 청개구리 단원을 직접 배우지 못했던 나는 반대말을 묻는데 모두 엉뚱한 답을 적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순덕이는 그 단원을 빼먹었다. 무슨 이유로 순덕이는 그 날 결석을 했던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날 순덕이는 내 앞에서 종일 고갤 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태 후던가 전쟁이 일어났다.(계속)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