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저만치 한 여인네가 걸어가고 있다. 까만 정장 차림새로 고탄력 스타킹에 검정색 단화를 신고 있다. 머리는 단정하게 자르고 키가 큰 편이다. 사내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보속이 경쾌하고 고르다. 아이도 반바지 정장 차림으로 친척집 결혼식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 뒤를 따르고 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셈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왠지 민망하여 앞질러 정거장으로 향했다.
전동차가 문을 열어놓은 채 대기 중이다. 자릴 잡고 앉는다. 종점이라선지 차내가 한유하다. 얼마 후, 아까 본 그들 모자가 들어선다. 까닭 없이 반갑다. 아이 엄마가 긴 다리를 옆으로 포개 눕히고 앉으며 모은 무릎 위에 까만 핸드백을 놓는다. 곧은 콧날이 받쳐주는 무테안경에다 이마는 희고 준수하다. 아이 옷은 사립 유치원 원복인 모양이다. 흰 스타킹에 검정색 가죽구두를 신은 앙증스런 두 발이 차 바닥으로부터 오륙 센티미터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다. 엄마가 아이 무릎을 가볍게 누른다. 흔들던 다리를 멈춘다. 전동차 문이 닫히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요일 오후, 차 안은 한갓지게도 여기저기 빈자리가 눈에 띈다. 내가 먼저 자릴 잡았지만 여인네와 마주 앉은 꼴이다. 눈을 감는다. 그러다 까무룩 졸았던가, 멎었던 차가 덜커덩 출발하면서 눈이 뜨였다. 맞은편엔 여전히 그들 모자가 그림같이 앉아있고, 그 사이 아이 옆엔 할머니 한 분이 앉아있다.
할머니가 자꾸만 고갤 돌려 아이를 내려다본다. 아이도 할머니를 한번 쳐다본다. 비녀를 꽂은 반백의 머리, 주름 깊은 구릿빛 굴, 후줄근한 나일론 천의 흰 저고리, 무릎 위엔 보퉁이가 하나 놓였다. 시골에서 텃밭이라도 가꾸다가 서둘러 친척집 결혼식에 다녀가는 차림새다.
할머니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이를 보고 웃는다. 아이는 얼른 눈길을 거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을 뗀다. 아이 엄마도 신경이 쓰였는지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할머니가 보퉁이를 추스르더니 매듭을 풀기 시작한다. 맨 위에 웬 버선이 한 켤레 놓였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맨발에 흰 고무신을 신고 있다. 곤때가 묻은 버선을 들어내자 작은 대바구니가 보인다. 바구니 뚜껑을 연다. 그 속에서 아이 손바닥 크기의 한과를 한 개 꺼낸다.
아이가 힐끔, 아이 엄마도 순간 곁눈질을 했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할머니가 보퉁이를 대충 여미더니 한과를 아이에게 내민다. 아이가 못 본 척한다. 할머니는 한과를 아이 눈앞으로 가져간다. 한번 흔든다. 말없음, 그러나 할머니는 아가, 어서 받으렴, 이런 눈짓에 시늉이다. 아이가 할머니 표정을 얼핏 살피자 할머니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가 이번엔 고갤 돌려 엄마 표정을 살핀다. 엄마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겠지만 모른 척한다. 할머니가 몸을 내밀며 한과 든 손을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 좀 더 적극적인 몸짓이다. 아이가 다시 엄마를 쳐다본다. 아이 엄마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행색을 살핀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잠시 생각하는 눈치다.
언제부턴가, 차안의 승객들이 하나 둘 이 세 사람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무관심한 척 딴청들이다.
할머니가 엄지와 검지로 잡은 한과를 아이 눈앞에서 다시 두어 번 흔든다. 아이가 엄마 얼굴을 떠 한 번 쳐다보고, 엄마가 드디어 고갤 끄덕였다. 아이가 이윽고 할머니 손에서 한과를 옮겨 받는다. 할머니는 손가락에 묻어있는 튀긴 쌀 알갱이 한 알을 입으로 가져가며 만족한 듯 웃는다.
아이가 받아든 한과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할머니는 그제야 자기 맨발에 신경이 쓰인 듯 버선을 신기 시작한다. 아이 엄마가 할머니의 볕에 그을린 손발을 얼른 훔쳐본다. 그러면서 아이 손에 들린 한과를 어찌해야할지 생각하는 눈치다.
버선을 신고, 풀기 없는 나일론 치마를 한차례 쓸어내리고, 보퉁이를 추스른 할머니가 아직도 한과를 그냥 들고 있는 아이를 본다. 아이도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가 눈짓한다. 어서 먹으라는 시늉이다. 먹어도 괜찮다는 표정이다. 맛있다고, 달다고, 입맛까지 다셔 보이며 깊은 주름웃음을 웃는다.
아이가 호물대는 할머니 입을 보고, 손에 든 한과를 번갈아 본다. 그러다 이번엔 엄마 얼굴을 쳐다본다. 엄마는 무표정이다. 그러나 처치곤란, 어찌해야 좋을지 판단중이다. 승객들은 이제 아이 엄마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제가끔 상상하는 눈치다. 이들 세 사람의 무언극에 도취돼있는 듯 싶기도 하다.
‘어여 먹어, 아주 맛있는 과자란다.’
‘어서 먹으렴, 내게도 너 같은 손주가 있단다.’
할머니가 재촉하는 눈치다. 아이가 다시 엄마 표정을 살핀다. 엄마도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다. 순전히 내 생각인지 모르지만, 승객들의 무언의 압력까지 감지된 듯 싶다. 아이 엄마의 불편한 심기가 쏜살같이 하얀 이마를 가로 지른다. 평소의 교양이 불끈 솟는 짜증을 잠재우는 순간이다. 이윽고 여인이 아이에게 가볍게 눈짓한다. 할머니에게도 뒤늦게나마 목례를 하고 안경을 고쳐 쓴다. 은빛 귀고리도 찰랑 움직였다.
아이가 알았다는 듯 한과를 입으로 가져간다. 그 순간 전동차 안의 승객들이 휴, 한꺼번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전동차는 그사이 터널을 통과했다. 창밖의 봄볕이 눈부시고 지나치는 천변의 개나리꽃이 화사하다. 전동차 안의 형광등 불빛이 차라리 침침하다. 아이는 이제 안심한 듯 한과를 마음 놓고 잘라먹는다. 즐거운지 아이는 두 발을 흔들흔들 장난친다.
“다음은 000역!”
차내 방송이 나오고, 단막극의 막이라도 내리듯 전동차가 다시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차가 정거장에 멎자 등산객차림의 승객이 한 떼 차에 오른다. 그들 누군가의 배낭주머니에 꽂힌 소형 라디오에서 ‘봄날은 간다’ 노래 소리가 흘러 나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