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난 동물병원 원장은 다리를 절고 그 앞 피자집은 늘 산토끼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피자를 먹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원장은 안개 자욱한 산길에서 병든 산토끼를 주워왔다. 일주일 내내 정성을 다해 돌보니 산토끼는 아이들처럼 씩씩해졌다. 차에 태워 유원지 깊숙한 곳까지 가서 산으로 돌려보내는 날은 내가 동행을 했다. 다음 다음날 산토끼는 되돌아왔다. 네가 살 곳은 산이라고, 그래서 차에 태워 다시 유원지에 갖다 풀어놓았지만 또 돌아왔다.
또 차에 실으려고 찾으면 지하실로 피해 달아나고 옥상으로 도망가 숨는다 한다. 아무래도 토끼가 도시 속에서는 불행할 것 같아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마침내 그는 포기했다. 토끼가 아이들 속에 들어가 숨어서 아이들처럼 오물거리며 피자를 먹고 있어서다. 새로 난 동물병원 원장은 다리를 절고 그 앞 피자집은 늘 제가 살던 산을 버린 산토끼들로 가득하다.
이건 신경림 시집 '뿔'65쪽에서 옮겨 적은 <산토끼>라는 시이다. 시집 맨 뒤쪽 판권 밑자리에는 *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창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적혀있지만, 그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칠판에 옮겨 썼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장철문 시인이 쓴 동화 '노루삼촌'을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게 그날 수업내용이었다.
학생들은 밤늦은 시간인데도 내 강의를 귀기울여 들었다.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동화와 산문시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가방을 챙기는데 남아 있던 한 학생이 손바닥만한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여학생은 분명 선생님이라고 했다. 나는 그 소리가 우선 듣기 좋았다. 평소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학생이 많지만, 그건 어법에도 틀리고 듣기도 거북했다.
그 여학생은 꽤나 나이가 많아 보였다. 여자대학인데다 특히 야간인 경우 나이 많은 학생이 많았다. 대개 낮에는 직장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상자를 받아들고 휴게실로 왔다. 율무차를 한잔 마시며 포장을 풀었다. 종이상자 안에는 손수건이 세장, 그리고 만년필 뚜껑같은 게 하나 들어 있었다.
“선생님, 이게 뭐지요?”
마침 휴게실 안으로 들어와 분필가루 묻은 손으로 커피를 타는 같은 처지의 시간강사에게 내가 물었다.
“아. 이건 분필끼우갠데요.”
사람 좋아보이는 그이는 내게서 그 만년필 뚜껑같은 걸 받아 사용법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짠!”
나는 옆반(보통 B이라고 부른다)에 들어가자마자 그 분필 끼우개를 들어보이며 그 날 밤 마지막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주 앞반에서도 필히 분필끼우개를 사용하리라 다짐하였다. 마치 서점에서 내가 내 시집을 빼보듯이 시침을 떼고 분필끼우개를 꺼내 쓰면, 우리집 애에미가 아이한테 사보낸 넥타이를 이튿날 담임선생님이 매셨더라고 좋아하던 막내둥이처럼, 내색은 않더라도 그 여학생이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 다음날 나는 전동차안에서 졸다가 가방을 잃어버렸던 거다. 그 속에 분필끼우개가 들어 있는 가방을.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그리고 구름다리를 건너, 새로 건축중인 민자역사의 임시 출찰구를 빠져나온 나는 대기중인 학교버스에 올랐다.
빈손(강의하러 가는 시간강사가 빈손이라니)이었다. 버스기사양반이 목례를 했다. 앞자리에 앉았던 학생이 자리를 내주었다. 목례를 받기도 내 준 자리에 앉기도 거북했다. 빈손이 부담스러웠다.
전동차 종점에서 버스로 한 시간은 더 달려가야 되는 곳, 수도권 위성도시 외곽의 전문대학은 산골짜기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버스에서 내리면 또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다. 거기서도 빈손은 부담이었다. 항상 무언가 들려있던 두손을 처리하기가 그렇게 어려울줄이야.

가방속에 들어있던 물건들, 그러니까 주민등록증이며 은행카드 등은 이럭저럭 처리를 했다. 과제물같은 건 학생들에게 솔직히 말하고 다시 제출하라 했다. 컴퓨터에 들어있으니 걱정말라고 말한 건 이태전 내 강의를 들은바 있는 조교였다. 문제는 분필끼우개였다.
내가 분필끼우개를 생각해 낸 건 이튿날이었다. 가방을 잃어버린 그 날, 그러니까 화요일 수업때는 분필끼우개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상실감이 매우 컸던 모양이다. 어지저지하다보니 하루가 가버렸다. 그 상실감 속에 분필 끼우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수요일 아침,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기는데 아내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새것이었다. 분필끼우개가 들어있던 상자 속의 세 개 중 하나였다. 문방구에 가면 있겠지, 뭐.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문을 나섰다. 역으로 나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그런데 문방구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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