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에 마을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내다본 거리의 간판들과 별다름이 없는 종류였다. 문방구라는게 있긴 있었다. 대개 초등학교 교문앞인데 내가 찾는 물건은 없다고 했다. 복사, 코팅, 팩스, 그리고 담배를 팔거나 완구점, 떡볶이집이 붙어있기 일쑤였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보이지 않는다더니. 목요일 금요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 구구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시창작강의가 있다.
백화점에 가기위해 전동차를 탔는데, 앞자리에 앉은 늙수구레한 아주머니가 성경책을 읽고 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말씀이었다. 어쩌면 백화점에서는 구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그런데 정말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초록색 칠판아래 지우개와 함께 분필끼우개가 하나 턱하니 놓여있는게 보였다.
‘당신이 찾으셨지요? 제가 여기 있어요. 찾으시니 얻은 거에요…….’
분필끼우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누군가 사용한듯 분필이 끼워져있었다.
나는 분필을 빼보았다. 고두심과 같은 제주도 고씨라는 그 여학생이 준 것과 똑 같았다.
나는 빼낸 분필을 다시 끼워 칠판 턱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었다.
강의를 끝낸 나는 수강생들에게 ‘이런걸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다. ‘문방구에서 팔겠죠.’대답은 뻔했다. 나는 사무실 처녀에게 물었다. 어떤 강사가 쓰다가 놓고 갔을 거라고 했다. 그 강사에게 어디서 샀느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누군지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일요일엔 한주간 학생들이 제출한 레포트를 검토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꼼짝할 수 없었다.
월요일 오전 종합대학 강의가 끝난 후, 시내에 다시 나가 보았지만 또 허탕이었다.
결국 빈손으로 그 여자대학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그 여학생 자리가 비어있었다. 휴, 결석이었다. 지각 한번 없던 학생이었는데······.
“교수님, 분필꽂이 안쓰세요?”
B반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물었다.
“지난주 쓰시길래 물티슈 준비 안했는데…….”
“······.”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가방 잃어버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튿날, 가방 잃어버린지 일주일째. 졸지 않기로, 아예 가방을 든채 전동차 안에 서있는데 손전화 벨이 울렸다. 구구백화점 문화센터 사무원이었다.
“분필꽂이 쓰신 분 누군지 알아냈어요. 역삼문구에서 판대요”"
친절하기도 해라. 마침 빈자리가 났다. 가방을 안고 앉아 눈을 감았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얘기가 늘어지는 것 같다. 빨리 끝내야겠다.)
이튿날, 짬을 내서 역삼동엘 갔다. 전철역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 2층에 ‘역삼문구’ 간판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두세개 쯤 사두자. 꼭 일주일을 헤매는구나.’
그때였다.
“선생님, 여기 웬일이세요?”
눈앞에 고은정 그 학생이 서있었다.
“고군은 여기 웬일인가, 그동안 무슨 일 있었나?”
학생은 고갤 숙였다. 검은 스웨터 옷깃에 하얀 리본이 꽂혀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사무실이 근처라고 했다.
다른 얘기 없이 점심만 먹었다.
학생과 헤어진 후에야 나는 슬그머니 그 문구점에 들렀다.

정신없이 한학기를 보내고 눈빠지게 성적집계까지 끝내자 곧바로 몸살이 왔다. 쉬라는 신호였다. 신호따라 푹 쉬기로 했다. 그리고 정초, 소포가 하나 배달 됐다.

“선생님, 나중에야 알았어요. 가방을 잃어버리고, 분필꽂이 사러 헤메신걸요. 그러니까 그때 역삼역에도 그래서 오신거지요. B반 친구한테 뒤늦게 그 얘길 듣고(그 친구는 분필꽂이 사드린게 바로 전줄 모르고요.) 콧날이 시큰해지더라구요. 기쁜소식 한가지 전하게 돼 기뻐요. 선생님한테 신경림선생의 시 <산토끼>와 장철문선생의 <노루삼촌>얘기듣고 동화를 한편 썼는데, 그것이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가방 속에 작품이 실린 신문 들어있어요. 분필꽂이도 몇 개 사 넣었구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