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건 내가 살면서 쌓아온 기억들이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진다. 치매가 무서운 건 그 때문이다. 아무리 중한 병이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근본조건을 허물어뜨리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강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치매는 인간에게서 기억을 삭제하고 관계를 소거시켜, 오직 생화학적 기제로만 존재하게 만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한 관계 속으로 던져진다. 이들 관계와 맺어진 인연들이 기억에 각인되어 ‘나’를 만든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태어남과 동시에 맺게 된 관계에는 ‘국가’도 포함된다. 특정 나라의 국민이라는 정체 역시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관계 중 하나다. 우리가 속한 대한민국의 헌법은 국민이 마땅히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건을 말머리에 명시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무릇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3·1운동과 4·19혁명을 자신의 기억창고에 저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 4·19는 오랫동안 ‘의거’로 불렸었다. 이승만 독재를 끝장낸 4·19혁명을 탱크와 군홧발로 무참히 짓밟은 박정희 세력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5·16혁명’이라 추어올리기 위해 꼼수를 부린 까닭이다. 그러다가 민주화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1993년에 이르러서야 본래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렇다면 3·1운동이라는 부름말은 온당할까? 3·1운동을, 말하자면 ‘새마을운동’ 따위와 비슷한 무게로 달아도 될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일제강탈기 동안 이 용어는 금지어였다. 식민당국은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1919년에 통치전략을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꾼 뒤에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 일’이 언급되는 걸 극도로 꺼렸다. 검열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기미년 사건’이니 ‘기미년 소요’니 ‘기미년 폭동’ 등으로 묘사해야 했다.

반면에 조선 내지보다 자유로운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그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이를테면, 중국 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세력의 한 축이었던 민족혁명당은 1938년부터 ‘3·1대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은 ‘영어 잘하는’ 기독교인으로 유명한, 그래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던 김규식이 발기하고, 김구 주석보다 몸값이 훨씬 높았던,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김원봉이 이끈 무장투쟁단체다) 그 영향을 받아 1941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같은 표현을 썼다.

왜 ‘혁명’인가? 그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로, 우리 헌법의 말머리에 나오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같은 날 공포한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제1조)고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제국’에 살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전제군주제에 맞서 민주공화제를 선포한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인가? 또 이것이야말로 ‘프랑스혁명’에 비견할 만한 천지개벽이 아닌가?

나아가 상해 임시정부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및 국내의 한성정부와 뜻을 합해 같은 해 9월 11월 통합정부로 재출발하면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다”(제2조)고 선언했다. 이것이 현행 헌법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2항)는 조항으로 다듬어졌다. 이제 국민은 정치를 잘못하는 정부를 야단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마다 <헌법 제1조>를 노래로 부르며 ‘주권재민 主權在民’의 뜻을 다진다. 박근혜 탄핵을 이끈 힘도 거기에 있었다.

이런 국민이 언제 탄생했을까? 단언컨대, 3·1혁명 때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한마음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그 날, 흔히 ‘거족적인’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는 이 혁명은 과거의 백성이 국민으로 진화했음을 드러낸 신고식이었다. 그러니 최근 역사학계에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혁명정부답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여성도 임시의정원(지금의 국회)에 포함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임시헌장에서 아예 남녀차별은 물론 신분이나 빈부에 따른 차별마저 철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는 이렇게 평등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였다.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백 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꿈을 우리가 잇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적 치매 환자’이기를 거부하고 ‘기억의 공동체’에 참여한다. 기억할 것이 많을수록 잊어버리기 쉬운 법.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억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마련. 어쩌면 혁명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