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8/2008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54)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오늘날 로맨스와 공상과학 소설과 부드러운 에로티시즘을 배합시킨 미학으로 새로운 영성을 나타내려는 화가들이 많이 있다. 이런 장르는 특별히 중세 기독교의 이미지나 인도나 아프리카의 고전 조각품들과 비교하면 피상적인 경우 또한 많다. 내가 깊이 인상을 받은 것은 옛 이미지들 속에 있는 고풍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근엄한 비전의 깊이이다. 대조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영적’ 예술이 품는 영은 전적으로 다른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뭔가 초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승화되고 경외심을 느낄 만한 것으로 다가서게 만들었는데, 반면에 현대의 영적 이미지들은 종종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겨우 한 발짝 더 나가서 심오하게 내면적이며 초월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 속으로 들어가도록 밀어붙인다.

때때로 종교적 이미지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절대로 영적인 것에 대항하며 리얼리즘을 겨냥한다. 영과 성인들에 대한 자연스럽고 문자 그대로 현실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경건성을 얄팍하게 드러내며 경외스러움과 거룩함 속에 있는 타자성 otherness에 대한 인식의 결핍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여기서는 마치 상상력의 이런 좁은 한계를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너무 가까운, 너무 인간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어째서 과거의 사람들은 그들의 예술 속에서 거룩함을 포착할 수 있었을까? 성인이나 중세 대성당의 이미지를 자세히 보라. 그러면 어떤 형식에 맞춘 수염과 머리와 가운의 부자연스런 선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리된 리얼리티를 고딕 양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거룩한 예술이 영적인 것을 인간적인 범주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는데, 실은 그 반대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자아를 영혼 속으로 들어가도록 확대시킬 파워는 지니고 있는 반면에, 실제로는 우리의 영성을 위축시키고 있다.

융이 종교적 이슈와 영적 이슈를 심리학에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괄목할 만큼 하였고, 우리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을 심화시키려 또한 노력하였다. 그가 이해하는 면에서 보면, 참된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미스테리에 참여한다. 그것은 단순히 서로를 지지하는 것 정도가 아니다. 사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비범한 자서전적인 글 속에서 보듯이, 그는 견줄 데 없는 지성과 경건성을 가지고 이미지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심리학 이론은 범주화와 해석에 대한 덜 미묘하면서 점진적으로 현대적인 방법이 생기게 하였다. 영혼과 이미지에 대한 그의 헌신은 둘로 갈렸는데, 그의 이론체계를 세속화한 것이 있고, 반면에 그 개인을 (성인으로 떠받들 만큼 canonization) 영화롭게 하였다

1970년대에 Spring이란 저널에서 제임스 힐먼이 이미지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하였다. 그는 융이 머뭇거리며 상징을 특정 의미로 환원시키는 것을 이슈로 삼았다.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릴 때조차도 상징이란 낱말이 피상적인 해독 deciphering과 사전적 정의를 부추긴다. 힐먼은 함축성과 의미를 집요하게 배제시키는 노력만큼이나 이미지의 높은 성실도를 보존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크게 집중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했다.

신화와 질병과 종교에 관한 내 자신의 저술에서, 내가 발견한바, 오랫동안 이미지를 추적할 때 그 역사와 어원 그리고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것 등을 연구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인 해석에까지 다다를 필요는 없다. 이미지를 바짝 따라가면, 그것이 가리키는 미스테리와 연관 속에서 나는 이미지로부터 교육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결과적으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이미지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요, 이미지에 대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끌려서 새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르시서스에 나의 연구 때문에 나는 이 신화 속에서 계속 살도록 이끌리었고, 도처에서 그를 눈여겨보고 거의 매일 그의 미묘함을 더욱 더 보면서 살고 있다. 그것으로 나의 상상력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내가 바로 그가 되었듯이, 그가 또한 내가 되었다.

내가 또한 발견한 것은, 일단 내가 어떤 이미지 -액티온 Acteon, 나르시서스 Narcissus, 대프니 Daphne, 고도 Godot,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에 대한 매혹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 작업은 결코 끝이 나지 않았다. 책과 에세이를 쓰고 또 쓰면서, 나는 나를 사로잡는 몇 개의 이미지 속으로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자면, 내가 아르테미스에 관하여 생각하고 글을 쓰면 쓸수록 도대체 그의 이야기가 뭔지를 덜 알게 되었는데, 까닭은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그의 복잡성과 미묘함 때문이었으며, 같은 논리가 내 생각에 솟구치듯 계속 떠오르는 다른 인물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나의 친구 로널드 쉥크 Ronald Schenk가 한번은 나를 휴스턴에 있는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채플에 데려간 일이 있었다. 우리는 예술가의 지성소 sanctuary 안의 적막 속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어떻게 하면 현대의 회화가 단순히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관상 contemplation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보았다. 그 채플에 갔었던 경험을 안고, 지금은 런던에 있는 테이트 현대 박물관 Tate Modern Museum을 방문하고 있지만, 로스코 실 Rothko Room에 앉아서 경외스러운 그의 캔버스에 둘러싸여, 사람들로 북적이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이 마련해준 거룩한 경내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벽이 없는 채플에 앉아 있으면서, 그래도 영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현대에도 우리가 이미지 보기를 마치 쇼의 볼만한 장면이나 대상물처럼 취급한다. 아니면, 제일 낮은 수준에서는, 우리가 이미지를 존중하는 까닭은 그 희소가치나 금전적 가치 때문인데, 이는 곧 그들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의미를 우리가 상실했다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나 잡지나 텔레비전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는데, 그 모두는 경향 자체가 너무 얕아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은 증폭시키지만 제공해 주는 것은 별로 없다. 나쁜 이미지는 정크 푸드 junk food와 같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주는 환상을 안겨 줄 뿐이다. 우리가 그런 것에 중독이 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 잘 만들지 않든지 사려 깊게 쓰지 않기 때문이다.

Venerate 숭상이란 말은 사랑의 여신 비이너스적인 단어이다. 이미지를 숭상할 능력의 상실은 영성의 필수 요소인 비이너스적인 감수성의 상실과 나란히 선다. 심지어 비이너스와 명백하게 연관된 모든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기독교조차도 비이너스의 아름다움이 중심역할을 하는 것은 허용해왔다. 비록 교회가 공식적으로 비이너스의 필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큰 교회들과 전례와 수세기에 걸쳐서 기독교가 영감을 불어넣은 예술의 그 재산은 비이너스를 존중한다.

우리는 이미지를 숭상함으로써 신앙의 미스테리에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동시에 지성적으로 참여한다. 그 속으로 종교의식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들을 심오하게 알게 되며, 그들이 우리의 사람됨의 일부가 된다. 가톨릭인 나로 말하자면, 미사가 평생 동안 힘 있는 종교의식이 되어왔다. 시작은 나로 하여금 나의 실패들을 생각하도록 초대하는 데에서부터 되었다. 그 다음에서 전통적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교훈을 얻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상상력을 내가 형성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 다음에 내가 경험한 의식의 가장 거룩한 부분은 신과 의식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조건들이 들어맞았을 때, 이 의식은 계속 되풀이 되면서, 나로 하여금 현세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영원 속에서 살도록 해준다.

내 자신의 영성의 심화과정은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증가하는 것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아르보 패르트 Arvo P?rt의 미사곡을 듣는데, 내가 두 세계에 현존하는 것을 강렬하게 느낀다. 당장에 하는 작업과 내 영혼의 깊은 내면의 삶이라는 것을 동시에 느낀다. 패르트는 내가 삶 속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소리로 성취한다. 즉, 고대의 감각과 미학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다. 만약에 그가 고대 음악을 갱신하면서 지녔던 헌신과 상상력을 내가 똑같이 지니고 그것을 기독교에 실현시켜 구체화시킬 수 있다면 제도냐 개인의 영성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전통을 버리지 않고도 나의 영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음악 생활과 심리학 연구와 이미지에 관한 다양한 이론으로부터 이미지에 관한 것을 많이 배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진지한 화가인 나의 아내를 통하여 몸과 직접성 immediacy을 발견하였다. 나는 내 아내가 이미지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과 동시에 노력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하는 방식 양쪽을 본다. 나는 그가 자신의 상상력과 영감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도 보고, 어떻게 그의 예술 작품이 그의 영성수행의 한 형태인지를 본다. 물론 그에 대해서 나와 동의를 안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라도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미지라는 나의 생각을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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