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 정부가 군위안부 존재 자체를 극구 부인하는 걸 보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저들이 야만인이어서가 아니라 나름으로 문명인이라는 자의식에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일 야만인이라면 명백한 증거 앞에서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전시에 우리만 그런 게 아냐!’ 라고 외려 큰소리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 고위층 인사 가운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상인이라기보다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정신병자에게서 인류 양심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분명 저들이 군위안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역겨울 정도로 뻔뻔한 게 아니라면,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만세일계인 ‘천황의 국가’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저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한 야만적인 일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그에 상응한 행동을 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봄직도 합니다.

문제는 저들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막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자신들이 행한 전쟁범죄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용기를 보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후 독일과 일본이 다른 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전후 독일은 전시에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피해국들과 함께 평화 공존의 길을 열었지만, 일본은 그러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은 국가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은 문명국이라는 자국 중심의 도덕적 강박이 평화의 길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죄책고백’이란 개개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이지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시야를 좁혀서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와, 예수를 극도로 증오했던 바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를 재판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 물은 게 아닙니다.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서 물은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할지라도 그가 안 진리는 자신의 행위를 보상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바울은 진리 앞에서 자신의 전존재가 무너지는 체험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빌라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용기가 없으니 핑계거리를 찾았던 것이고, 바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할 용기를 지녔기에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서도 괴수임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이사야의 언표에서도 우리는 같은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혼탁한 역사 현장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왜 이렇게 사는 게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계시기에 얼굴을 가리시는 것입니까’라며 원망할 때, 이사야는 매우 격정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질타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라고. 우리는 이사야가 백성들을 질책하면서 그 강조점을 ‘너희’에 두지 않고, ‘죄악’에 두고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죄’라는 것이지요. 비록 백성들의 죄가 막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죄를 직시하고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적시한 ‘죄’는 ‘갈라놓는 자’ ‘분리시키는 자’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마비시키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게 합니다.

그러하다면, 죄책고백의 용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대와 이웃하여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지요.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리로 삼아 죄인과 함께 죄까지 용서하라는 건 아닐 것입니다. 죄인은 용서해도 죄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말은 들었어도, 죄를 용서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그래서 죄책고백은 중요합니다. 죄책고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 나와 너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갈라놓은 악성종양을 뽑아내는 일이기에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