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중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미·중간의 경제 전쟁으로 보이지만, 이면은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동요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개방적 경제, 협력적 안보, 다자주의 국제질서가 트럼프의 일방주의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다분히 신자유주의 경제적 과실로부터 소외된 미국 백인들에게서 분출하는 포퓰리즘의 기류를 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세계 질서 재구축이라는 보다 큰 밑그림이 작용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부상은 초강대국 미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패권을 노리고 미국에 동조하는 일본이 있고, 인도가 있습니다. 지금 트럼프와 아베 사이에는 전후에 형성된 전통적인 미·일동맹이 아닌 가히 미·일극우동맹이랄 수 있는 새로운 미·일동맹이 자리잡아가는 중이고, 이 새로운 미·일동맹을 중심축으로 하여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 4개국으로 이뤄진 인도-태평양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미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개편한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미·중간의 갈등은 중국을 억제하면서 자국의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구조화시키려는 미국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지난 5월 28일 일본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는 일대 사변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일본이 건조한 항공모함인 카가호에 승선했습니다. 성조기와 욱일기가 펄럭이는 함상에서 트럼프 부부는 아베 부부와 미일동맹의 장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25분간 연설한 트럼프는 우리가 ‘동해’로 부르는 바다를 노골적으로 ‘일본해’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무부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쇄기를 박았습니다. 트럼프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가히 ‘새로운 역사적 국면’의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제정세에 문외한인 사람이 ‘새로운 역사적 국면’ 운운한 것은 마치 한말 망국의 혼란상과 다를 바 없는 국내 정치의 말기현상 때문입니다. 한말의 정치는 세기적인 변동 국면에서 패거리 정치로 날밤을 세웠습니다. 싸움은 극렬해져서 각기 외세를 불러들여 자기 땅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한말의 혼란상은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랏일을 마치 가업 정도로 여기거나 패거리들의 먹잇감 정도로 여긴 데서 비롯된 권력의 말기현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지금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의 막말 퍼레이드도 그런 말기현상의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가 혼탁한 시절이었다 해도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까지 지금처럼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퍼부은 적은 없습니다. 아예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일을 바라보는 정치라면 그처럼 피 냄새나는 말은 스스로 삼가 할 것입니다.

역사의 전환기 때마다 한국의 정치는 내부 요인보다 외부의 요인에 더 크게 반응해왔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은 단순한 4강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최근세 이후 중국-일본-미국 3국은 한국 정치에 열병과 같은 소용돌이로 작용해왔습니다. 지금 이 3국이 우리 내부의 정치를 혼돈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트럼프와 미국이 있지만, 우리로서는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궁벽한 처지입니다. 그 어느 쪽도 답일 수 없는 역학관계입니다. 여기에 대한민국 보수의 딜램마가 있습니다. 자칭 대한민국의 보수는 본질적으로 외세 의존적이 아닌 때가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국난 극복을 위한 정치 협력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들의 막말은 단순히 저급한 욕망의 배설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외세 의존의 정치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학습한 생존방식이기도 합니다. 막말의 배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반도의 분단은 외세의존적인 정치의 보루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기적인 구조 변화의 불쏘시개로 사용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처럼 엄혹한 상황임에도 ‘정치’는 하지 않고 ‘권력투쟁’으로 영일이 없습니다. 협력의 정치가 절박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