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선생은 이북이 고향입니다. 전쟁 때 가족과 헤어진 사람은 한 둘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도 그 가운데 한 분이지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남에 와 새 가정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끝내 혼자 살다 가셨습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월남한 이들 중에 끝까지 혼자 살다 가신 분도 한 둘은 아니지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런 분들과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혼자 살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도 한지에 먹으로만 그렸습니다. 크고 작은 접시가 수십 개, 굵고 가는 붓 또한 수 백 개. 그것으로 그려내는 빛깔과 모양은, 울긋불긋 색채를 사용하는 그림과 달리 신비한 느낌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먹물의 농담만으로 색채 이상의 효과를 내셨던 거죠. 한라산의 백록담과 백두산 천지, 금강의 사계절과 지리산의 구름바다를 그리셨어요. 한강과 대동강, 황소의 코뚜레와 천정에 매단 메주, 벽에 걸린 옥수수도 그렸습니다. 밭 매는 아낙네와 제기 차는 아이, 썰매 타는 아이들과 방패연도 그렸습니다. 아기 업고 장에 가는 보퉁이 인 아낙네와 위여위여, 쟁기질 하는 농부도 그렸습니다. 길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낙동강 칠백리를 그리고 처마밑 제비집과 입을 짝짝 벌린 여섯 마리의 아기제비, 잠자리 물고 온 어미제비도 그렸지요. 그러는 사이 오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수많은 아들딸을 키웠습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성 다른 아들딸을 가르쳤습니다. 밤낮없이 그림을 그려,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댄 거지요. 그 가운데 맨 꽁지가 우리 아버지랍니다.
아버지도 그림을 그립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수많은 아들딸을 길러내셨지만 그중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버지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그림은 할아버지 그림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크고 작은 접시와 굵고 가는 붓도 사용하지만, 할아버지처럼 먹물 또한 쓰긴 쓰지만, 아버지가 즐겨 다루는 것은 녹황청적 화려한 색채 쪽이지요. 그리는 대상도 용이나 불상 등이랍니다.
아버지는 처음에 궁궐이나 사찰 등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건축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리는 그림이나 무늬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답니다. 소아마비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는 탱화의 명인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보니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가 드뭅니다. 탱화불사가 있는 기간은 꼬박 절간이나 작업실에 가 계시거든요.
“이제 떠나자.”
아버지가 두루마리를 챙겨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부축하십니다.
“밤은 챙겼지?”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요, 칼두요.”
내가 멜빵가방을 툭, 쳐 보이며 대꾸했습니다. 그 속에는, 내가 시장에서 골라 산 알밤과 잘 드는 작은 칼이 들어있습니다. 그 밖에 배며 사과, 감이며 대추 등 과일도 들어있고요.
보통 ‘삼색과’라고 부르는 이것들은, 관혼상제에 쓰이는 세 가지 빛깔의 과실로, 깎은 밤, 붉게 익은 대추, 그리고 옛날엔 검은 잣을 일컬었으나 근래에는 잣 대신 쓰는 곶감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깎은 밤’이 내 몫이지요. 내가 손재주가 좀 있는 편이거든요. 아버지가 연필을 직접 깎아 쓰게 하셨고, 어머니가 일찍부터 종이접기 등 만들기를 가르친 때문인지 학교에서도 ‘공작’ 이라면 내가 으뜸이고, 그래서 조각가가 꿈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운전석에 앉고 아버지와 나는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건강하시면 자리가 바뀌었을 텐데, 그래서 앞에 나란히 앉은 부모님을 뒷자리에서 바라보며 가는 것도 좋을 텐데…,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아버지 팔짱을 끼었습니다. 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연안부두에는 휴일을 즐기려는 많은 여행객이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차에 탄 채 배에 올랐지요.
“바다구경 하련?”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엄만 아빠랑 있어, 뒷자리로 와서.”
내가 말했습니다.
“녀석두 참!”
아버지가 웃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나는 자동차 사이를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습니다.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는 사람,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사람, 비틀거리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어른들 틈에 끼어 얼른 난간을 잡았습니다.
“이 녀석! 너, 권 총무 아들이지?”
담배를 피우던 한 어른이 아는 체를 했습니다.
“맞어, 막내네 맞상주!”
“그려, 밤 잘 치는 놈!”
곁에 서있던 어른들도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래, 아빠는 어디 계시냐?”
“차 안에요.”
“그렇지, 그렇겠지.”
이들 모두가 할아버지 제사에 가는 분들이죠. 할아버지 도움으로 공부한 ‘정암 장학회’의 회원이기도 하구요.
아버지는 그 장학회의 부총무랍니다. 나는 잠시 마음이 꼬부라집니다. ‘부총무’라는 아버지 직함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냥 회원이라면 괜찮아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니까, 감투라도 하나 씌워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아왔던 거죠. 그러나 금세 풀렸습니다. 어른들이 별생각 없이 한 말이고, 제삿날 잊지 않고 오는 분들은 그래도 오지 않는 사람에 비하면 훨씬 가깝게 느껴졌으니까요. 그리고 이들은 모두 성은 다르지만 내겐 ‘큰아버지’거든요.(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