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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 거동 보소
한쪽 다리 저는구나.
보라색 물감 접시
왼편으로 밀쳐놓고
빨강색 커다란 접시
맨 앞으로 당겨 놓고
노랑, 파랑, 초록색은
벼루 옆에 둘러놓고
주황색에 붓을 찍어
접시 가에 묻혀 보고
남빛 물감 큰 붓에 적셔
한지 바탕에 그어 보네.
이어서 접시마다
빨·주·노·초·파·남·보
큰 붓, 작은 붓
굵고 가는 붓 걸쳐 놓고
무릎 꿇고 왼손 짚고
드디어 연적 들어
벼루에 물을 붓네.
천천히, 천천히
한가롭게 먹을 가네.

먹을 가는 사내 생각
꿈틀꿈틀 용 한 마리
불 혀를 내두르고
맹호출림 포효에다
봉황새들 날아드네.
무엇을 그릴 건가
화공 손에 땀이 배고
구경꾼 침 삼키네.
손바닥에도 땀이 나네.
먹빛 한 가지로
온갖 사물 다 그리는데
일곱 빛깔 다 살려서
무엇을 더 그릴 건가,
꽃이 피고 나비 날고
매미 울고 석류 익고
새 날고 개 달리고
초가집을 그릴 건가,
아니다, 다 아니다
전쟁 마당 그리는구나.
사람이 사람 잡는
전쟁터를 그리는구나.

부서진 집 우물가에
손가락 빨며 서 우는 아이,
총 맞은 어미 가슴
젖을 빠는 갓난아기,
피 흘리며 쓰러진 병사
손에 든 어미 사진,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남정네,
보따리 이고 걸어가는 여인네,
멍에 메고 걸어가는 소,
삐걱거리는 마차 바퀴
주먹밥 나눠 먹는
거렁뱅이 된 아이, 어른
기차 화통 위에까지
기어오른 피난민들…….
그 옆에 정암 선생,
한지 펴고 붓 드시네.
먹물 듬뿍 찍은 붓 가다듬어
나뭇가지 그리시고,
가지 끝에 붉은 점이
수줍은 매화로다.
스승, 제자 재주 겨루듯
묵향속에 어울리네.

이 집안에 명인 났네.
구경꾼 찬탄이라
어화둥둥 경사로다.
사람들 일어서고
정암 선생도 덩실덩실
춤사위 떨치는구나.
점순이도 놀랐는지
구름 보고 짓는구나.
아버님,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선생님께 큰절 올리고
정암 선생 손잡아 일으켜
당신 곁에 앉히신다.
이 사내 저 여인네
공손히 잔 올리고,
북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며
정암선생 잔을 받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