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한 얼굴로 서둘러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분주한 발자국 소리와 뒤섞인 웅성거림, 소음공해나 다름없는 안내방송, 역사(驛舍) 모퉁이에 쪼그리고 잠든 노숙자들, 좌판을 펼쳐놓고 뭔가를 파는 사람들, 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건장한 아저씨, 전철이 플랫폼에 닿기가 무섭게 신속정확한 동작으로 냉큼 자리를 차지하는 청년들, 그 앞에서 손잡이를 부여잡고 흔들거리며 서 있는 노인들, 그야말로 ‘노약자석’이란 ‘노련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앉는 자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철 속 풍경...

브라질 리얼리즘 영화의 기수 월터 살레스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리우데자네이루 <중앙역>은 첫 장면부터 낯설지가 않다. 단순 소매치기범을 총살로 즉결심판해도 ‘그저 그런가보다’하고 냉랭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꼭 우리 같다. 그 스산한 틈바구니에 두 주인공이 끼여 있다. 한 명은 전직 교사였으나 이제는 문맹인들을 대신하여 편지 대필로 먹고사는 중년의 노처녀 ‘도라’이고, 다른 한 명은 도라의 의뢰인으로 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년 ‘조슈에’다. 이쯤되면 도라가 조슈에를 거두겠거니 싶지만, 본래 영화의 매력이란 것이 관객의 예상을 빗나가는 데 있지 않던가? 아니나다를까, 도라는 조슈에를 입양기관(사실은 장기밀매단)에 팔아넘긴다. 참으로 인면수심이다. 아니, 어쩌면 ‘남의 불행이 곧 내 행복, 남의 실패가 곧 내 성공’이라는 잔인한 공식으로 무장한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렇게 무참하게 버려진 조슈에나, 그렇게 밉살맞게 양심없는 도라에게,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와 무책임한 익명성이 넘실대는 세속도시의 한복판에서 떠도는 우리 모두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지를 묻는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비롯하여 온갖 상을 휩쓴 명성에 걸맞게,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주제를 정말 맛있게도 다뤘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려니, 무조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지난 날 동안 못된 짓을 많이 했어도 누구나 ‘희망찬 새해’ 앞에서는 치사하고 얌체스러워진다. 컴퓨터가 말을 안 들을 때 간단히 ‘재부팅’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삶도 무조건 새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인과응보’니 뭐니 도덕군자같은 소리말고, 금새 들통날 거짓말일지언정 무조건 ‘앞으론 다 잘 될 거야’하는 식의 덕담만 듣고 싶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오늘의 운세’에 울고 웃는 유치찬란한 동물인가 보다.

그런데, 영화 <중앙역>은 우리의 속 보이는 기대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듯, 희망이란 절대로 ‘싸구려 은혜’가 아님을 보여준다. 만약에 도라가 조슈에를 인신매매한 돈으로 장만한, 꿈에 그리던 리모콘 딸린 TV에 심취해서 그냥 저냥 조슈에의 존재 따위를 잊어버렸다면, 그는 정말 가망 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남아있던 양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성 혹은 신성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장기밀매단의 손아귀에서 조슈에를 빼내와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기로 마음먹고서, 황량한 사막 속으로 뛰어든다. 그 사막을 건너야만 ‘세상 끝’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들이 찾아가는 아버지 이름이 ‘제수스’(예수)이고, 그의 직업은 ‘목수’이며, 사는 곳 이름은 ‘새 동네’라는 게 예사롭지 않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조슈에), 또 있더라도 전혀 무의미한(도라) 현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고 그와 화해하는가를 모색하는 것이다. 도라는, 가족을 버리고 술과 여자에 빠져 생을 탕진한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슈에의 아버지도 분명히 “술주정뱅이 노름꾼에 여자나 패는 망나니”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슈에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목수”일 거라는 신념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바로 조슈에의 ‘어린애다움’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일찍이 산전수전 다 겪어, 그 ‘닳고닳은’ 수완에 가끔씩 혀를 내두르게 하는 조슈에가, 어떻게 이 한 가지 믿음에 있어서만큼은 그토록 순진할 수 있는지 놀랍기까지 하다. 도라는 이러한 조슈에의 믿음을 조롱하지만, 결국 조슈에로 인해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사슬로부터 풀려나는 치유에 이른다.

그럼, 조슈에는 아버지를 만났는가? 물론 아니다. 예수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편지만 남겼지, 끝끝내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지만, ‘새 동네’의 예수 집에는 배다른 형제들, 모제쉬와 이사에쉬가 있다. 조슈에는 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공동체를 세워나가면.

새 해가 밝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책제목처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일지 모른다. ‘중앙역’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로부터 단절하여 새로운 삶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막으로 나가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기존에 나의 삶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권위에 대한 전면 검토가 없고서는 어떤 새로움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사막을 건너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 있을 진저. 희망이란 사막을 건넌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세상살이가 그리 녹녹하진 않아도, 그나마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면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올해도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히 1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