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인드라망의 옥구슬은 불교의 『화엄경』에 나오는 비유이다. 우주 내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서로 독립해 있거나 무관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강력한 비유로 전해진다. 북경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에서 태풍을 일으킨다는 유명한 ‘나비효과이론’은 이러한 불교적 ‘연기론 緣起論’을 실감나게 반영한다.

천성산 내원암에서 조용히 수행하던 한 여승이 어느 날 문득 여전사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니, 표현이 틀렸다. 여전사라니... 여전사라면, <에일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나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처럼,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매에 독기 품은 눈동자는 기본이요, 온갖 무기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전투력은 옵션으로 갖춰야 하리라. 하지만 이 가녀린 비구니 지율은 오히려 싸울 줄도 모르는 사람같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를 미워할 성 싶지가 않다.

하기야 그가 거리로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그로 하여금 40일도 아니고, 세상에, 100일씩이나 곡기를 끊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 미움이 아니다. 사랑 때문이다. 천성산을 지키고 싶은 사랑, 천성산에 깃들어 사는 뭇 생명을 지키고 싶은 사랑, 특히 멸종위기에 처한 도룡뇽을 지켜주고 싶은 사랑이 그를 거리로, 단식에로 내몰았다.

미움으로 시작한 싸움은 오래 갈 수가 없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 시작한 싸움이라야 오래 가는 법이다. 예수가 그랬지 않은가? 미워서 십자가를 진 게 아니다. 미움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인 게 아니다. 예수의 길은 철저히 사랑의 길이었고, 평화의 길이었다.

이제 이 땅에
뭇 생명의 신음소리 그치지 않으니
이 무상한 육신을 버려
천성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저자거리에 나가
몸과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지율스님이 지은 시 <천성의 품을 떠나며>를 읽노라니, 로마서 8장 22-23절이 저절로 오버랩 된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뭇 생명의 신음소리를 듣고 보면서 커다란 자비심으로 공명하는 이를 “관세음觀世音 보살”이라 부른다. 천성산 암자에서 기도하던 지율은 하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땅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산이 아파하는 소리, 물이 썩어가는 소리, 나무와 꽃이 죽어가는 소리, 도룡뇽이 울부짖는 소리... 이 모든 땅의 소리들이 결국 부처님의 소리와 둘이 아니며天地不二, 더 나아가 땅과 자기 몸이 둘이 아님을身土不二 느꼈기에 그는 과감히 암자를 박차고 거리로 나섰다. 대구-부산간 고속철을 이용하는 3퍼센트의 ‘고객’을 위해 어마어마한 공사비를 쏟아 부으며 천성산 터널을 뚫겠다는 정부에 맞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도룡뇽 소송’을 낸 그의 행위는 철저한 보살행이요, 자비 실천이었다.

국토개발이 먼저이고, 자연보호는 나중이라고 믿는 사람들 눈에는 ‘자연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지율식 논리가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다.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 도룡뇽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제법 많이 보았다. 심지어는 지율스님의 단식을 두고, 자기 암자를 지키려는 이기심의 발로라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지율스님이 맞서 싸운 것은 바로 이러한 개발우선주의, 인간중심주의, 배타주의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지구상에 제일 늦게 도착한 손님이면서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며, 다음 세대의 살 권리마저 앞당겨 쓰고 있는 구제불능의 욕심쟁이가 바로 우리이지 않은가?

비록 종교의 겉껍질은 다르지만, 신앙의 내용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늘/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신앙인치고, 생명보다 죽음을, 평화보다 폭력을, 사랑보다 돈을 택할 자, 누구란 말인가? 우리 시대의 개발이 말 못하는 자연과 미래 세대에 대한 죽임을 동반한다면, 효율과 편리를 가져다주는 대신에 폭력을 극대화시키고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기꺼이 개발보다는 지속가능한 삶 sustain- able life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상에 가장 먼저 나타난 색깔은 초록색이다(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제3일을 눈여겨 보라). 아마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지율스님은 자기 자신을 인드라의 구슬로 여겨 최초의 울림, 곧 ‘초록의 공명’을 만들어냈고, 지금 그것이 이 구슬 저 구슬을 깨우면서 거대한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5월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마침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한 마당이니, 이참에 가정의 범위를 좀 넓혀 보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가정이라는 뜻이고, 세상에 거하는 만물이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창세기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이 창조된 제6일에는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도 함께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인간과 동물은 서로 대단히 밀접한 친족관계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도룡뇽을 보살핀다는 것은 ‘이웃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가족사랑’의 표현이 아닌가? 숲을 지킨다는 것, 물을 지킨다는 것 역시 우주가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갸륵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이 땅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지구상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이 아니 거하시는 곳이 없다는 깨달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이자,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단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