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시화씨가 쓴 “부처 아닌 체하기”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납니다. 그가 인도의 한 아쉬람에 머물며 명상수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깨달음에 별 진척이 없어 고심하던 중, 하루는 구루 한 분이 와서 그러더랍니다. “잠든 사람은 깨우기 쉽지만,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가 없다. 그대, 차라리 깊이 잠들라. 아니면 자신이 이미 깨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대가 부처 아닌 체 행동한다면, 아무도 그대를 부처이게 할 수 없다.”

스승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더 이상 ‘부처 아닌 체’ 행동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내 안에 이미 부처가 있는데 어디서 부처를 찾을 것인가, 제법 그럴듯한 깨달음에 사로잡혀 마음이 맑아진 것이지요. 그 상태 그대로 류시화씨는 아쉬람 식당을 찾아갑니다. 아침 공양을 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그 식당에는 아직 부처 아닌 체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먹을 음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전날 저녁도 부실했는데, 아침까지 못 먹다니.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래도 얼른 표정을 밝게 고칩니다. 이미 부처인 걸요. 얼굴가득 연꽃미소를 머금고 숙소를 향해 아쉬람 문을 나서는 그에게 이번에는 프랑스 친구가 말을 겁니다. 여행비가 떨어졌으니 좀 꿔달라고요. 그런 식으로 돈을 빌려가서 떼어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번에도 류시화씨는 그냥 속아주기로 합니다. 부처 아닌 체 행동하면 안 되니까요.

릭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한 그가 평소대로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자, 릭샤꾼이 언성을 높이네요. 애당초 요금을 정하지 않고 탔기 때문에, 자기가 부르는 대로 다 내야 한다나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평소보다 10배가 넘는 돈을 지불하려니, 속이 쓰려 죽겠습니다. 좋게 말하려니까 릭샤 운전수가 고래고래 언성을 높입니다. 머리 위에서 태양은 작열하지, 구경꾼은 자꾸 모여들지, 이러다가는 큰 싸움이 나게 생겼습니다. 외국인인 류시화씨는 퍼뜩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짓기로 합니다. 잽싸게 릭샤꾼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는 동전 몇 개 던져주고 숙소 안으로 후다닥 도망쳐 들어간 것이지요.

샤워기에서 나온 시원한 물이 온몸에 닿는 순간, 류시화씨는 퍼뜩 깨닫습니다. 아차, 내가 또 부처 아닌 체 행동했구나. 어쩌면 그 릭샤꾼은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것을 까짓 돈 몇 푼 아낀다고 아귀다툼을 벌였으니…. 샤워하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가 봤지만, 그 릭샤꾼은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매순간 부처 아닌 체 행동하기란 그나 우리나 똑같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예수의 기백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합일의 경지에는 저절로 도달하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면 참으로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증언대로 ‘주님의 어머니’지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은 마리아는, 그 생명을 낳았으되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生以不有.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얼른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여, 다시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비움의 영성을 실천합니다. 그러니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끝끝내 지켜보는 이 어머니는 독하다거나 강하다는 수식어로는 부족하지요. 마리아는 하나님의 씨앗을 잉태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았는걸요.

한 해의 끝자락에 마치 준엄한 심판대처럼 예수님 생일이 버티고 있습니다. 무릇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는 생일이 있지요. 그리고 생일의 진짜 주인공은 어머니지요. 낳아진 생명이 있다는 것은 낳은 생명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생일 아침이면 우리는 미역국을 먹습니다. 어머니의 은덕을 기린다는 표시로요.

예수님 생일에 우리가 참으로 기억하고 기념할 것은 마리아의 믿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낳은 여성 마리아. 그가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태에서 하나님이 태어나시도록,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자기 욕심을 줄여나가야 할 텐데…. 언제까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신 척하며 살 건지,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