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리고 삶의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더해질수록 점점 더 나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나라는 주체가 너무도 강렬했던 어린 시절, 어떤 일에든지 당당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 내가 이 순간 이 공간 안에 있구나’ 하는 정도의 자각이 있을 뿐이다. 마치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에 잠시 화면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대 위에 오른 연극배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한 무대에 오른 다른 배우들을 바라본다. 얼마나 열심히 자신들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 그야말로 치열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나는 저렇게 치열하지 못한 것일까’를 자문해 본다.

저마다 각기 다른 역할을 맡고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들이 해야 할 바를 하게 되는데, 만약 그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진실 여부를 판단한다면,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어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프리카에서처럼 태어나자마자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도 엄청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이들도 있다. 지구인 모두가 지니고 태어난 것이 그 수효만큼이나 각양각색인데, 어찌 보면 이것은 크나큰 모순처럼 보이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모순처럼 보이는 우리의 현실에서의 현상에는 반드시 숨겨진 깊은 뜻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뜻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이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리라. 그런데 이 숙제는 다른 숙제와 달라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무엇을 참고로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직 당사자에게만 맞는 숙제요, 오직 당사자만이 풀 수 있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숙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는 숙제, 오직 유일한 나만의 숙제, 그래서 더욱 어렵기만 한 숙제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더듬거리면서 이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향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지극히 단순한 인생의 명제조차도 수없이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깨닫게 된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가, 저 사람은 무엇을 잘 했길래 저렇게 복을 받는 것인가’하고 자문할 때가 많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른 후에 보니 약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결국 숱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이 나를 강하게 하고 나에게 주어진 숙제를 풀어가는 여정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아, 이제는 이만하면 숙제가 웬만큼 끝났겠지. 그러면 사는 것이 조금은 편안해지겠지.’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무대에는 또 다른 막이 오르고 나는 또다시 그곳에 배역을 맡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배역을 잘 감당하니 더 어려운 배역이 주어지고… 아, 살아가는 매순간의 현실은 참으로 가혹하기만 하다.

무대 위에 선 나는 나의 연기를 혼신을 다해서 하려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캐릭터에 몰입하려 한다. 이 캐릭터의 역할에 열중하고 나면 나에게 주어진 숙제를 그만큼 풀어낸 것이리라.

하지만 이 무대 위에서는 모든 상황을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출자는 이미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다. 온전히 자신만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나를 지켜보는 자들만이 있을 뿐이지,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를 돕는 손길은 있을 수 없다. 배역을 감당하고 숙제의 몫을 감당하는 것은 오직 각자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막이 내리면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었던 배역을 통해서 자신만의 숙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