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서울이라 하지만, 한 집에서 30년이나 넘게 살다보니, 이웃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고, 웬만한 가정일은 서로가 다 알고 산다. 밖에 나갔다 우리 집 골목에 들어서면 놀다가 꾸뻑 인사하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아저씨는 벌써 집에 오셨어요.” 하면서 정보를 주는 아기엄마를 만날 때가 많다. 그 아기는 매일 밖에 나가자고 보채서 길에 잘 나와 있고, 아기 엄마가 바쁠 때는 동네 할머니들이 보아주기도 한다. 동네 아이들은 할머니들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사모님 할머니를 제일 좋아한다.

사모님 할머니 남편은 은퇴한 목사님이다. 자녀들이 외국에 살고 있어서 아이들을 보면 손자들을 보는 것 같다고, 감자도 쪄주고 부침개도 부쳐준다.

사모님은 방학 때면 신이 난다. 외국에 있는 손자들이 할머니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 달 남짓 있는 동안, 동네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교회도 다니면서 우리생활을 배운다. 할머니는 부모를 떠나서 훈련하러 온 손자들을 잘 돌보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심혈을 기울인다.

“필리핀에서는 신발을 신고 살아서 애들이 신발 벗는 것을 잘 몰라. 그걸 고치느라 마루고 방이고 신발 신는 곳과 벗어야 되는 곳을 테이프로 구분해 놓고, 지키게 하느라고 애 먹었어. 잘 지키면 스티커도 붙여주고, 선물도 주고 했지, 며칠 지나니까 이제 조금 되는 것 같아.”

그 사모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어렸을 때 소설에서 읽은 무서운 기숙사 사감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초등교육을 전공한 교수가 자기가 만든 지도법을 실습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이것저것 총동원해서 그 나름대로 손자들을 가르친다. 그 부모인 자녀들도 어머니의 교육 실력을 인정한다. 집에 돌아온 아이들이 달라져 있고, 자신들이 도저히 못 고친 버릇들을 할머니가 고쳐놓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해준 얘기 중의 하나이다. 작년 봄에 손자들이 왔을 때, 길에서 파는 갓 깐 병아리 네 마리를 샀다. 노란 병아리가 예뻐서 아이들이 사자고 졸랐다. 그 중 두 마리가 잘 자랐다. 손자들은 병아리에게 모이도 주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을 신기해했다. 손자들이 돌아가고, 그 병아리도 여름이 되니 중닭이 되었다. 그런데, 마당에 놓아서 기르니 채소를 기를 수가 없었다. 아깝지만 도저히 키울 수가 없어서 잡아야 될 것 같았다. 주인이 손자들이니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할머니는 먼저 큰 손자에게 전화를 했다. “닭을 잡아먹어야겠어, 닭이 자라서 말썽을 많이 부려. 깡패 닭이 되었어, 배추랑 상치, 쑥갓 심은 것도 쪼아 먹고, 고추줄기도 부러뜨리고, 할아버지 손도 쪼아서 피나게 한다. 이제는 할머니가 더 못 키우겠다.” 이 말을 들은 초등학교 2학년 큰 손자는 키우던 닭을 어떻게 잡아먹느냐고 엉엉 울었다. 그래도 할 수 없으면 할머니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을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여섯 살 손녀가 전화를 바꾸더니 “할머니, 닭이 깡패 닭이 되었으면 할머니가 닭을 꼬-옥 안아 주세요. 그러면 닭이 착해져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가 대견했지만, 닭은 퍼덕거리고, 난리를 쳐서 안아줄 수가 없다고 했다. 손녀는 계속 엉엉 울면서 마지못해 할머니 맘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내가 처음 상담공부를 할 때,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추워서 벌벌 떠는 것이니, 담요를 덮어서 꼭 안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기억나는 것은 그 때 그 말이 강렬하게 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 때 나도 담요가 필요했고, 나를 꼭 안아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고맙게도 누군가가 내게 그 일을 해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보는 내 눈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았을까? 참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할머니를 닮아서라고 생각했다.

여섯 살 아이의 믿음처럼, 깡패 닭도 안아주면 착한 닭이 되고, 시들은 나무도 물을 주면 싱싱하게 자라고, 병든 사람도 사랑으로 보살피면 쉽게 회복되는 것은 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사랑하는 일에 그렇게 인색했을까? 사랑은 사라지거나 닳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할머니, 잘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어린 손녀가 내 옆에서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웃을 염려하고, 도와주는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다. 사랑이 하는 일에 감동하고, 서로 안아 주면서, 사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살아야 한다고 다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