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사? 아니면 그냥 넘어가?’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 생일을 앞두고, 요 며칠 내 머리에서 맴도는 생각들이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지가 2년이 넘었다. 그동안은 치료 받느라 정신이 없어서 생일을 그냥 넘겼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안정이 되어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으니 생일을 어떻게 하나 걱정된다. 생일잔치 하는 쪽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병원이라는 장소가 어색하고, 그동안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이다. 병실에 있는 다른 환우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다.

나는 가족들 생일을 잘 챙기는 편이다. 이 일에는 친정어머니 영향이 크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는 둘째 딸인 우리 어머니 생일이 되면 떡도 하고 소도 한 마리 잡아서 소작을 하는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을 푸짐하게 대접했단다. 어머니 생일이 추석이 지나고 난 뒤라 모든 것이 풍성했다. 새로 지은 예쁜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흥겹게 보내면서, 자신이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결혼 뒤에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키우면서도 불평 안하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생일을 축하하는 일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태어난 날, 생일을 맞은 사람은 그 날의 행복한 주인공이 된다. 모든 일들이 오롯이 그를 위해 진행된다. 마치 하나님이 마음에 그림을 그려 놓고 손으로 그를 지으실 때처럼, 가족들이 그를 위해 정성들여 음식을 차리고, 선물도 준다. 평소에 잘 듣지 못했던 진솔한 사랑의 말과 칭찬을 듣기도 한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창조를 다시 한 번 하시는 날이라고나 할까? 생일 맞은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회개도 한다. 한 걸음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힘도 얻는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활동하고 생명의 기운이 한껏 살아난다. 일 년 중 나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가?

그러나 누구나 다 이런 좋은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일찍 잃은 사람이나,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거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내 주위에도 사는데 바빠서 가족들 생일을 한 번도 차리지 못했다는 친구도 있다. 더욱이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요즈음 시대에서는 식구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은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자신이 태어난 날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념하는 일은 우리의 근원을 생각하는 것이니,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본다.

남편을 생각한다. 나와 함께 산 세월이 오십년을 넘었다. 건강할 때 생일은 그냥 한 해에 한 번 당연히 치르는 행사로 여겼다. 그런데 병중에 있는 지금, 축하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하는 건가?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남편을 축하해 주고 싶은 간절함도 있다. 그 많은 수술과 시술, 주사와 처치들을 잘 견뎌내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살고 있는 남편이 너무나 장하고 훌륭하다는 감동이 있다. 또한 간병을 해야 하는 어려운 가운데 있는 가족들도 그 안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한 마음이 되어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병중에 맞는 생일을 축하할 명분은 충분하지 않을까?

생일날, 케이크를 들고 병원으로 갔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할아버지 생신이냐고 모두 환영한다. 케이크를 병실 한 가운데 차려 놓고, 남편은 휠체어에 앉혔다. 생일축하 노래를 다 함께 불렀다. 남편이 눈을 조금 떴다. 케이크 위에 촘촘히 박힌 반짝이는 촛불을 바라본다. 얼굴에 슬쩍 웃음이 지나간다. 모두가 덩달아 웃는다. 여럿이 후 불어서 불을 끈다. ‘와’ 하는 함성과 큰 박수 소리에 병실에 활기가 일어난다. 행복하다. 여든 다섯 번째 생일, 하나님의 사랑과 치유하시는 창조의 역사가 이곳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남편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고였다 떨어진다. 둘러 서있는 사람들 마음에도 슬픔이 고인다.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지금 우리들이 사는 자리, 뒤늦게 우리 노래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따라들어 온 봄 햇살이 우리의 애잔한 마음을 따듯하게 쓰다듬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