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볕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흙내음이 봄바람에 실려 올 무렵이면, 밭에서 연장을 들고 일하고 있는 아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에 앞서, 밭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땅땅 굳은 땅에서는 여린 싹이 뿌리를 뻗어나가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또 땅이 물기를 충분히 머금고 숨도 잘 쉬게 하려면 밭 일구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아이들부터 호미를 부지런히 놀리거나 제 몸집만한 삽을 가지고 밭을 뒤집습니다. 삽이 익숙하지 않아서 삽날 어깨 위에 올라가 콩콩 뛰어도 봅니다. 큰 아이들은 볍씨에서 몇 해 농사를 지어본 터라 삽 쓰는 태가 꽤 맵시 나요. 삽날 어깨에 몸의 힘을 실어 발로 지그시 눌러주면 삽이 땅 속으로 푸욱 들어가지요. 진흙 덩어리나 단단한 돌이 끼어 있으면 자세를 바꿔 보거나 몸의 힘을 다르게 써 보거나 그걸 빼는 데 적합한 쇠스랑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흙이 주는 다양한 느낌을 자연스레 몸에 받아들입니다. 또 흙에서 나온 지렁이도 만나고 온갖 모양의 돌도 찾고 친구랑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고 땀도 흘리고. 이렇게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봉긋봉긋 예쁜 밭들이 만들어집니다. 밭이 완성되고 허리를 쭈욱 펴고 밭을 휘 돌아보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조금 있으면 밭에 씨앗을 심을 터입니다. 올해는 멀리 강원도 화천에서 우리 씨앗을 지키려고 애쓰는 열여덟 살 젊은 청년이 볍씨학교에 몇 가지 씨앗을 전해주러 직접 왔습니다. 요즘 종묘상에 돌아다니는 씨앗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온 개량종. 그것도 벌레 먹지 말라고 화학 물질을 뒤덮어 써서 요란한 빛깔을 띤. 그런 씨앗들은 당장엔 소출에 유리한 듯 보이지만 한 해 살이 인생으로 그치고 맙니다. 꽃이 피고 씨앗이 맺혀도 그 다음 해를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거든요. 사람이 손을 대는 순간 우주의 힘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탓에 해마다 새로 씨앗을 구입하게끔 만듭니다. 그런데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씨앗다운 씨앗을 받았으니 좋은 일입니다. 검고 뿔이 있는 시금치 씨앗, 좁쌀알만 한 동글동글 들깨 씨앗, 여름 별미 옥수수알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씨앗을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귀한 씨앗 정성껏 심고 앞으로 잘 가꾸어 몇 달이 지나고 나면, 내년을 위한 씨앗들이 다시 영글겠지요.

아이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우주에 사람은 알지 못하는 신비한 힘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훅 불면 휙 날아가 버리고 마는 작디작은 상추 씨앗에서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상추가 나오는지, 새끼손톱의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오이 씨앗에서 어떻게 내 키보다 더 큰 오이 넝쿨이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이 알건 모르건 상추는 상추답게 오이는 오이답게 스스로 싹을 틔우고 힘껏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식물의 생장에 대해서 사람이 분석하고 언어로 표현하고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 힘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볍씨 아이들이 짓는 농사의 규모는 아주 작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체득하고 생명과 교감하는 작용이 제일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 농사는 볍씨 살림 활동 중에서 제일 기본이 됩니다. 씨앗을 심고나면 어린 꼬마들은 싹이 언제 나오나 싶어 말하지 않아도 밭에 들락날락합니다. 그러다 싹이 뾰롱뾰롱 올라온 걸 확인할 때면 “우와~ 싹 났다!!!” 좋아서 포봉포봉 뜁니다. 떡잎 다음으로 본잎이 쑤욱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거두어 맛보기까지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어 자기를 다 내어주는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아이들은 삶을 배우기도 합니다. 또 생명과 바르게 관계 맺는 방법,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배웁니다. 때와 철을 알게 되고 일의 시작과 끝을 익혀나갑니다.

아홉 살 아이들이 쓴 글 세 편 가운데 일부분을 발췌해서 옮겨봅니다.

“밭을 갈았다. 조금 힘들었지만 OO랑 꿈 얘기도 하고 친구들한테 귀신 얘기도 해주면서 하니까 재미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키울 채소를 생각하면서 밭을 갈았더니 더 빨리 끝났다. 내 모둠이 돌봐줄 채소는 오이와 시금치다. 시금치는 1학년 때도 키워봤지만 오이는 안 키워봐서 조금 걱정이 된다. 그래도 파이팅!”

“밭일을 할 때 지렁이가 있었어요. 지렁이가 호미에 찔릴까봐 지렁이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줬어요. 밭 끝의 쪽에 뒀어요. 지렁이가 땅 속에 들어갔겠지 하고 나는 돌아왔어요.”

“거기에 좋은 생명들이 심어지고 자라는 게 정말 기쁜 것 같다. 그래서 그 생명을 기쁘게 받아서 우리가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그 생명이 밭에서 나온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밭에 씨를 심으면 싹이 트고 그 싹이 커서 줄기가 더 길어져서 물을 주고 빛을 주면 많이 많이 커서 채소에 큰 줄기 옆에 위에 잎과 열매가 열린다는 게. 밭에서 어떤 신기술이 있었던 걸까?”

제가 일하고 있는 CAMP(아시아빈곤선교센터)는 필리핀의 마닐라 도시빈민과 이곳에서 살다가 정부에 의해 강제철거 이주된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역에 집중적인 협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에 있어서도 밥을 주는 피딩을 포함한 먹거리 지원이 아니라 교육과 직업에 집중해서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CAMP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의 10여개 쓰레기매립장 중에 하나인 카트몬에 작은 유치원을 건축했습니다. 이곳은 정부의 정책에 의해 4-5년 안에 철거가 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임시의 형태로 건축을 진행했습니다. 이 건축에는 남양주에 있는 화도교회의 몇몇 성도들이 십시일반 건축비를 모아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유치원을 건축하는 것은 특별한 아이들을 키우고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초등 중등학교가 무상교육인 필리핀에서 유치원은 그리 특별한 교육이 아닙니다. 학생 수는 많고 학교는 적다보니 유치원을 다닌, 선행학습이 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입학의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규모도 크지 않게 30명 정도가 공부할 수 있도록 진행합니다. 이곳에서 하루 2-3부제로 수업을 진행하면 80여명의 아이들이 최소한의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다음 과정이 진행될 수 있기에 우리의 사역가운데 소중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빈곤아동을 위한 교육지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성을 쏟는 부분 중의 하나가 청장년의 직업교육입니다. 현지의 NGO 단체들과 공동으로 컴퓨터직업교육 교실을 운영하는 일은 제조업이 거의 없고 서비스와 관광산업이 주축인 필리핀의 도심지역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한국의 사회적기업, 생태마을, 대안에너지 관련 전문가들이 아시아의 빈곤문제에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와중에 ‘사회적기업을 통한 아시아빈곤해소 모델개발’이라는 프로젝트를 지난해 4월 말부터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한신대 지역발전센터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전문가들이 필리핀의 빈곤지역과 강제철거 이주민 지역을 방문해 전문가 조사를 진행했고, 현지에서는 강제철거 이주민 지역의 5만여 명 6천여 세대의 10%를 일대일 방문면접조사를 통해 지역문제를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습니다. 그 후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현지의 조사단과 한국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워크숍을 갖고 구체적인 이주민 지역의 직업모델을 개발하는 심화단계를 거쳤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한국이 물질적 지원을 하고 현지에 직업을 만드는 형태의 기존의 일방적 지원의 모습이 아니라, 현지의 정확한 진단과 니드에 맞춘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모델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빈곤지역에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그곳에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이익에 대해서는 새로운 사회적기업에 재투자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생산적 모델의 형태입니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투자된 재화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남아서 지역이 발전하고 이것을 통해 빈곤문제가 해소되는 빈곤해소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시험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 년 여의 준비기간을 거처 이제 구체적인 사회적기업을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10월 한국과 필리핀의 전문가들이 토론한 내용을 현지 주민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그들이 직업모델을 선택하게 한 결과 봉재관련 사업을 첫 번째로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필리핀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규직 회사원은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을 감안해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복을 생산해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지역의 바랑가이(동사무소)도 전적으로 협력을 해서 필요한 건물을 바랑가이가 제공하고 전체적인 운영은 제가 일하고 있는 CAMP가, 일은 지역의 주민자치 조직을 통해서 진행하는 공동의 모델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4월 한 달간 준비 작업을 하고 5월부터 봉재교육을 시작으로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는 순조로운 진행이 되었지만 앞으로가 약간 걱정입니다.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지역과 개인은 더 많은 부분은 원할 것이고, 우리는 재투자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드는 것인데 이 부분을 합의하는 부분이 큰 과제입니다. 그래도 새로운 형태의 해외협력, 일방적 지원이 아닌 생산적인 협력, 새롭게 시도되는 모델이기에 그 기대감에 흥분이 가시질 않습니다.

내가 신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솔렌띠나메 농어민들의 복음 대화’인 "말씀이 우리와 함께"라는 책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농어민들이 성서를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특별히 충격으로 와 닿은 것은 농어민들이 성서를 읽으며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분위기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에 가서 대하는 성경은 너무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선 신학교에서 배우는 성서 개론에서부터 혼란과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며 알고 확신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던 신앙(?)마저 흔들리고, 여러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성서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편집되었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지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이 지은 "말씀이 우리와 함께"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아 조금 읽다 덮어 버렸다. 그런데 한 반년 쯤 후에 다시 읽으며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감동 그 자체였다. 읽어나가면서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흥분하도록 만들었다.

이유는 읽으면서 성서가 ‘나의 이야기도 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나를 매우 흥분하게 하였다. 성서가 단순히 편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계시어 계시와 은혜로 기록하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나의 신앙과 신학을 끝까지 하도록 붙들어 주어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게 한 것 같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단독목회를 할 때 김영운 목사님을 통하여 공동체 성서연구를 소개 받으면서 너무나 좋았다. 우선 일방적으로 누가 가르치려하지 않았다. 같이 같은 본문을 읽고 느끼고 이해하고, 결단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도 훌륭한 성경공부가 되는 것이었다. 성경이 아주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고 말하여지기에 더욱 그렇다.

성경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 좋았다. 느끼는 대로 마음껏 느끼니 심령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 때로는 느낌과 생각의 경계가 모호해서 생각을 말하면서 느낌이라고 할 때가 있고, 느낌을 말하면서 생각이라고 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실은 느낌보다는 생각이 많고 그 생각을 말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공동체 성서연구를 통해서 생각 중심에서 느낌 중심으로 이동해 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단순한 지식의 나눔이 아닌 내 삶과 부딪혀진 말씀을 나누려고 하다보면 생각보다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 더 진솔해 진다. 자기 삶과 부딪혀진 말씀을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를 성찰하게 되고 또 그것을 말하다보면 생각보다는 느낌을 나누게 된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다른 분들의 삶을 듣고 같이 공감하다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가슴으로 와 닿게 된다. 특별히 공동체 성서연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려 듣게 된다. 잘 들어야 가슴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나에게는 다른 이의 말을 대강 듣는 습관을 고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게 되는 좋은 점이 있다.

또 말씀을 여러 번역으로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들으며 명상하는 것 또한 말씀을 더 깊이 알게 하고 문자에 매이지 않고 폭 넓은 이해를 돕는다. 아울러 중보 기도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게 되어 친밀한 관계가 깊어진다.

이렇게 공동체 성서연구를 통하여 얻은 것들을 더 깊이 묵상하고 여기에 주석들과 나의 신앙고백을 기록하는 것으로 주일 날 선포하는 것으로 설교가 되고 은혜가 되니 일석이조가 된다. 혼자 책상에 앉아서 성경 읽고 묵상하고 주석보고 하는 것에 비해 더욱 풍성해지고 설교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 성서연구는 늘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