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11/2007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45)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천사는 단순한 보호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메신저이다. 많은 그림을 보면 천사들은 입에 문 깃발을 나부끼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특별한 천사의 언어를 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와 같은 언표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지만, 그렇게 하자 해도 지성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천사에 대한 믿음이 어쩌면 생의 불가사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가장 세련되고 정확한 수단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고, 지나치게 영적 리얼리즘에 지배되는 신관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생각을 일단 넘어서면, 우리 모두가 매일 매시간 거룩한 뜻을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뜻을 전하는 메신저가 바로 가장 중요한 리얼리티라는 이해가 그 뒤를 따르게 된다.

때때로 사람들이 말할 때, 그 말의 의미나 영향이 아주 강하고, 깊숙이 파고들어서 그 자체 속에 영원성이 들어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힘이나 효율성 속에서 우리는 거룩한 뜻을 감지할 수 있다. 천사들이 때로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나타나는데, 심지어 친구도 될 수 있고 가족도 될 수 있다. 천사들이 우리를 통해서 말도 하는데 영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주기도 한다. 우리가 천사의 말과 사람의 말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천사들은 수호천사나 메신저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한다. 천사 합창단이나 천사 하피스트는 너무나 익숙해지다 보니 천사를 생각하는 중요성을 우리가 잃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천사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런데 십년도 훨씬 전에 어느 날 찬란한 천사음악가들의 그림이 나에게 우리를 감동시킬 힘이 있는 모든 음악은 천사들의 연주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음악가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이런 천사의 음악을 끌어 낼 재능과 기예를 개발하기 위함이다. 사실상, 음악가는 천사의 매직이라고 알려진 고대의 수행을 화려한 모범으로 보여준다. 이 매직 때문에 오로지 천사들의 중재를 통해서 어떤 효과가 삶 속에 나타난다.

예술가들의 뮤즈는 천사의 다른 이름이다. 뮤즈는 나무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느껴질 수 있고, 확실히 그의 부재도 느껴질 수 있다. 어떤 예술가라도 그런 뮤즈가 사라지는 순간도 알고, 언제 돌아오는지도 안다. 이것이 단지 주관적인 경험일까? 투사? 환상? 어째서 뮤즈를 인정하지 못하고, 따라서 천사에게도 리얼리티를 허용하지 못할까? 천사를 걷어 찰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다.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든 안하든, 천사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으면, 천사가 우리를 친절히 대하지 않을 뿐이다.

천사들은 진지하게 인정하면, 영적 감수성이 돌아오는 표시가 된다. 우리가 메시지를 받으려면 메신저가 필요하다. 상상이 높이 치솟게 하려면 날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음악 속의 음악이 있어야 다른 어떤 많은 존재들 중에서도 뮤즈가 곧 천사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런 중재가 없을 때 삶을 어려워진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작업 가설 없이도
이 세상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하여 그 앞에 서있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

디트리히 본회퍼.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22. 숨은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나는 신론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미스테리를 회복시키려 노력해 왔다. 이런 무한한 존재에 대한 초월적인 심오한 이미지가 인격적 관계를 허용할 수 있을까? 내가 서술하는 의미로 공허한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가? 이런 공허한 신이 투사도 의구도 아주 말끔히 없어서 너무 공기처럼 희박할 만큼 추상적인 것일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흐린 가을날, 나는 골웨이의 홀릴 만큼 고요하고 부드럽게 채색된 포구에 있는 작은 해변에 서 있었다. 나의 딸은 파도에 밀려오는 작은 조각들을 던지며 이웃집 개와 뛰놀고 있었다. 그 개는 매번 점프하며 몸을 뒤채며 공중잽이를 하고 한껏 날듯이 조각들을 낚아채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물을 바라보면서 마치 홀린 듯이 포구 건너편의 잔잔한 물가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 사이를 헤집고 해가 나타나서 물이 불꽃 튀듯이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순발적으로 나는 나직이 말하였다. “그렇군요, 여지껏 숨어 계셨어요. 허지만 이제는 결심하고 보여주시는군요. 왜죠?”

나는 최근에 와서야, 십년 미만에,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삶과 자연의 미스테리에 대한 나의 감각은 명백히 나이를 먹는 것과 더불어 나의 인생과 세계 속의 자리매김이 둥글둥글하게 되는 가운데 강화되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하나님과 성인들과 천사들을 향하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달랐다. 이제 나는 수많은 종교적 전승을 공부하며 내 자신의 영적 주기에서 여러 단계를 거쳤다. 나는 무신론과 의심과 세속주의의 혼돈을 느꼈으나 그 중 어느 것에도 무릎 꿇는 일은 없었다. 내가 삶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숨어있는 창조의 미스테리에 대한 연결점을 나이브하지도 않고 인간적 형태도 아니고, 단순히 다른 인성에 대한 한 인성도 아니다. 나는 그 타자를 당신으로 부르지만, 내가 관계 맺는 그가 어떤 인격인지 아무런 관념이 없다. 그 관계를 말하고 느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옛날 선에서 말하듯이, 처음에 산을 본다. 그 다음에는 산을 못 본다. 그리고 나서 산을 본다. 그런 것이 나의 종교적 발달의 방식이었다. 처음에 나는 산을 보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하나님을 구름 너머 하늘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처럼 그렸다. 나이가 들면서 그 이미지는 세련되었다. 허지만 아직도 문자 그대로였고, 인간적인 척도에 따랐다. 수피 이야기가 들려주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개미에게 묻는다. “너의 신은 너와 똑같지 않냐?” “천만에요.” 개미가 대답했다. “그 신은 더듬이가 한 개 밖에 없어요. 우리는 두 개인데요.” 여러 해를 두고 내게 맴도는 생각을 그리도 잘 요약해 주었다.

좁은 신관이 집요하다. 나는 몇몇 선 개미들을 안다. 그들에게 기독교적 자선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그들이 답한다. “아, 그래요. 불성이죠!” 나는 도덕적 개미들을 안다. “나는 세상의 어린이들의 상태에 대하여 뭔가 하고 싶습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대답한다. “요즘 애들은 내가 어렸을 때 지녔던 확고한 도덕적 교훈이 없어요.” 나는 영적 개미들을 안다. 내가 종교에 대한 글을 쓰고 있노라고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 아, 그래요. 빛 가운데 거하라고 하세요.” 어떤 이들은 나더러 영혼 개미라고 하겠지.

 

 

 

 

 

 

 

 

 




120-802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152-28 2층   Tel 02)312-6803, Fax 02)374-7277
  cbsi@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