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이 사셨던 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그것을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려고 합니다.”(요이1:12). 편지로 쓰기보다 직접 찾아가서 만나고 싶은 마음 절절이 배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보다 더 애틋한 정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서로가 믿음 한 가지로 행복했던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그런 소박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까요? 믿음이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고 수단(도구)으로 변질되어서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믿음 자체보다 믿음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열망이 강합니다. 부적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이지요. 이런 믿음은 믿는 사람들끼리 그리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믿음을 경계합니다. 크게 이뤘다는 믿음은 작게 이룬 믿음을 얕봅니다. 보여 줄 게 없는 믿음은 보여줄 게 많은 믿음 앞에서 주눅이 듭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구박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의 고사가 있습니다. 다윗이 적진 안에 있는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부하 셋이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옵니다. 참으로 충성스런 부하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합니다. 뒤늦게나마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삼하23:17) 만일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은 사람이라면 이럴 경우 대답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다니!”

우리 주변에는 믿음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으로 성공하여 큰 기업을 일으킨 사람도 많습니다. 믿음으로 명예도 얻고, 권력까지 얻은 사람도 많습니다. 큰 교회를 세운 목회자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근로자들에게 박하게 굴고, 소비자를 우롱하고, 경쟁자를 모함하고, 거짓으로 성과를 조작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익을 취하고, 탈세하고, 사기치고, 작은 교회들을 고사시키고, 강한 자에게 비굴하게 굴고… 그렇게 얻은 것이라면, ‘하나님, 제가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되돌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믿음이 차고 넘치는 시대임에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되새겨볼 게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예수께서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2:4) 라고 대꾸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하는 대꾸 치고는 참으로 고약합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늘 뜻을 받들어야 하는 예수로서 인간의 수많은 요구들에 앞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제각기 분출하는 삶의 끊임없는 요구들을 다 들어주신다면 세상은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얻은 모든 것이 마냥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성만찬적인 삶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이시지만, 당신 스스로 포도주가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세상이 소란스럽고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물질의 결핍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질이 풍족해지면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물질에 매달리게 됩니다. 가난했을 때보다 부자가 되었을 때 돈 걱정을 더 많이 합니다. 온갖 종류의 악과 불의를 일삼고, 동료 인간 사이는 원수가 되고,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은 포도주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넘치는 포도주를 쌓아 놓고도 성만찬적인 삶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를 풍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믿는 이들이 믿음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단지 수단으로 삼아 물질의 기적만을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오늘의 믿음들은 포도주로 물을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