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

아침나절, 할멈은 딸네 집에 갔다. 외손주 받으러 간다 했다. 뱃속에 든 애가 아들인지 딸인지 어찌 아는지, 할멈은 미역꾸러미며 사위가 좋아한다는 무말랭이와 묵은지까지 싸들고 막내딸네 갔다.
옛날 같으면 부녀자들 우물가에 모이거나 콩밭 매면서 동네 애 가진 아낙네 두고 아들 딸 점치곤 했다. 뒤태가 표 안 나면 딸, 두 팔로 허리 받치고 뒤뚱거리며 팔자걸음이면 아들, 애 밴 배 뽈록하면 딸, 눈자위며 입술까지 꺼칠꺼칠해지면 아들, 채소 과일 좋아하면 딸, 고기 즐겨 먹으면 아들, 같은 뱀 꿈이라도 실뱀 보면 딸, 구렁이 만나면 아들, 딸기 먹으면 딸, 알밤 호두 꿈이면…….
그러나 요즘 세상 뱃속에 든 아이 불알까지 들여다보는 세상이니, 아무렇지 않게 할멈 손주 받으러 간다 했다.

재 너머로 고속도로 뚫리고 가까이로 아파트까지 들어섰지만, 근래 행정구역이 군이 시로, 리가 동으로 그 끝자만 바뀌었듯이 할아버지의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반 없다.
마당 끝에 이어진 텃밭, 부추 상추 아욱 쑥갓 좀 솎아내고 할멈이 그리 신신당부했는데도 점심 대신 막걸리 한잔 마신 것이 낮잠을 불렀던가. 여러 차례 다려 부은 간장 속에서 게 발 하나 건져내 깨문 것이 파리를 불렀던가. 눈까풀 자꾸 내리눌러 청마루에 목침 베고 누웠는데, 청하지도 않은 놈이 자꾸 날아와 입술을 빠는 통에 이쪽저쪽 돌아눕다 손사래로 쫓다 못해 에라 벌떡 일어난다. 비빈 눈에 보인 것이 개나리 울타리 사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뒤꼍 대숲 지나 안마당과 바깥마당 가로지르며 흐르는 실개울에 딱새 한 마리 날아내려 할아버지 눈치 본다. 앙증맞은 거, 두 발이 우선 개울가로 오종종 들어서며 좌우를 살피더니 잽싼 동작으로 고개 꺾어 어느 사이 머리를 물에 담갔다 치켜든다. 그 순간 잔 물방울 튀며 햇빛에 반짝인다. 다시 또 한 번 그렇게 길어 올린 물방울이 날갯죽지 등줄기로 흐르고, 진저리 치듯 두 날개 퍼덕이자 기다란 꼬리털도 키질하듯 깝죽댄다.
욘석, 할아버지 눈치 한번 더 보더니 냉큼 개나리 울타리 가지 사이로 날아올라 깃털 속속들이 물방울 털어내고 부리로는 연방 이쪽저쪽 날개 아래 잔털을 다듬는다.
팟팟팟! 탁탁탁! 힛힛힛!
다시 보니 두 마리다. 어디선가 한 마리 더 날아들어 번갈아 망을 보며 머릴 감는지 미역을 감는지 울타리 사이를 오르내린다.
“엇험!” 할아버지 헛기침에 그만 두 마리 모두 사철나무 잎 사이로 숨어들고, 그 속에서 이제 무얼 하는지 딱딱딱, 퍼덕대는 소리만 들렸다.
‘고놈들!’ 할아버지 다시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누웠다. 처마 밖으로 높푸른 하늘 펼쳐지고, 높다라니 떠받친 바지랑대 끝에 빨랫줄이 가로 걸리고, 거기 검정색 조끼 하나 매달렸다.
바람이 없나보다. 미동 않는 조끼 위에 잠자리도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