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독일에 머물면서 동네 슈퍼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익숙해진 모습이 장바구니를 든 남성들입니다. 장보러 나온 남성들은 한국의 대형마트에서도 익히 보아온 것이니 특별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 마트의 남성들이 대부분 가족을 동반하고 쇼핑 나들이를 나온 모습이라면 주로 혼자서 슈퍼를 찾는 독일 남성들은 살림을 위한 장보기의 인상을 주었습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서 성인남성의 일인가구가 총 가구수의 40%에 이른다고 하니 ‘살림하는 남자’가 많아지고 점차 그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었겠지요.

아직 친숙하지 않으나 우리 사회에도 ‘살림하는 남자’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우리를 당황하고 거북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말은 ‘씩씩한 남자’, ‘잘 생긴 남자’, ‘멋있는 남자’, ‘당당한 남자’ 등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살림하는 남자’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이 사회가 분명하게 그어놓은 성 정체성의 경계에 도전하는 하나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신조어는 이제 어느 정도 큰 불편 없이 수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오래 동안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남자의 영역과 가정의 살림과 돌봄을 담당하는 여성의 영역은 뚜렷하게 구분되었고, 그 맡은 자리에 어울리는 역할과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사회의 관행을 거슬리는 새로운 현실이 계속 등장하고 이 낯섦을 받아들이려는 의식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들은 ‘살림하는 남자’가 무능력하고 남자답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불안정한 고용구조와 비인간적인 시장경제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임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직은 ‘살림하는 남자’보다 ‘돈 벌어오는 남자’를 우선적으로 기대하기는 하지만, 살림과 돈 벌이가 성별에 따라 정형화되어 ‘살림하는 남자’와 ‘돈 버는 여자’를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고 괴롭히는 현상이 적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 역할의 변화는 외형이 바뀌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쁜 남자가 유행을 타고 일시적으로 호감을 얻거나, 불가피한 여건 때문에 살림을 하기는 하지만 가족을 돌보는 살림살이는 남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의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라면,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행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외형적으로 달라진 성별 현상과 내부적인 성별의식이 함께 하지 못하여 이중성을 띠는 경우에는 우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요즈음 전통적인 성 역할과 그에 대한 기대는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도전은 더 이상 개인 차원에서 대응할 수 없고 사회적 대응을 필요로 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돌보는 일(돌봄의 노동)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은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도움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여성들이 살림을 하면서 맡아온 역할이 바로 돌봄입니다. 돌봄의 일상은 삶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지만 오래 동안 그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살림하는 남자’들을 당혹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성 역할의 바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가가 적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정은 누구보다 가정주부들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돈 버는 여자’가 ‘살림하는 남자’보다 더 당당하고 더 나은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면 성 역할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성 역할의 바람직한 변화는 남자와 여자의 자리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일을 제대로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입니다.

살림살이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생명살림의 가치있는 역할로 받아들여지고 그로 인해 함께 행복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