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학교 밭 한켠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한 그루는 아름드리나무로 펑퍼짐하게 생겼고, 다른 한 그루는 날씬해 위로 곧게 뻗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봄에 불그스레한 갑옷을 벗고 애기 은행잎을 쏘옥 내고, 여름에 무성해졌다가, 가을에 노오랗게 물들어 화사한 빛을 선물하고 또 은행도 주고, 겨울엔 든든한 기운으로 굳게 서서 볍씨학교를 지켜줍니다. 나무 위에는 까치가 둥지를 틀고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농사지으려고 심어놓은 콩알이나 곡식을 콕콕 찍어 먹어서 가끔 얄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곳에서 몇 해를 함께 지낸 한 식구이지요.

늦봄 무렵부터 자연스레 나무 근처에 커다랗고 시원한 그늘이 생깁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 두 나무 사이에다 여남은 아이들이 모여 앉을 만한 평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창 밭일을 하다가 쉬자 하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은행나무로 달려갑니다. 보통은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히고, 몇몇은 나무에 조르르 올라가서 터억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체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은행나무를 곁에 두곤 합니다. 가끔씩은 소풍 나온 기분으로 평상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요. 은행나무의 굵은 가지에는 그네가 매어져 있어 꼬마들이 타고 놀기도 합니다.

이처럼 볍씨 아이들한테 자연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아래학교 쪽에는 조그마한 안마당을 지나면 밭이 있고, 윗학교에선 계단 몇 개 내려오면 여러 나무와 꽃들이 있는 꽃밭과 조그마한 뒷동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 벽 안에서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한테는 복된 공간입니다. 그 중에 아이들한테 단연 인기가 높은 곳은 ‘숲 속 놀이터’. 이곳 나무들 사이사이에는 그물이 넓게 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 놀이터’라고도 불리지요. 아이들은 자기 몸의 무게에 따라 출렁이는 그물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놀고, 해먹인 양 편안히 누워도 있습니다.

자연 속에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이 가까이 있는 만큼 아이들은 모기와 파리, 거미, 쥐 같은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지난 5월 말 볍씨난장(주 1회 볍씨 아이들 전체가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선 모기에 대한 논의가 길게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한 친구가 모기에 견디다 못해, ‘전기 모기채를 학교에 두자’는 안건을 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 1년 중 반 가까이 모기한테 물려 벌겋게 부어오르는 팔다리를 지켜보는 것이나 가려움을 견디는 게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모기랑 함께 사는 건 볍씨 아이 누구한테나 난제. 그래도 아이들은 고민을 하고 보다 생태적인 관점에서 의견들을 내놓았습니다. “전기 모기채에서는 전기가 흐르는데 위험해서 반대다.” “손으로 잡는 것보다도 모기채로 잡는 게 쉽지 않다. 모기채는 비효율적이다.” “볍씨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자고 하는데 모기를 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건 반대다.” “우리 학교 뒤엔 풀도 많고 산이어서 모기가 많은 건 자연적인 거다. 자연적인 방법을 쓰자.” “어성초를 쓰면 된다.” “풀이 많으면 모기가 많아지는데, 풀을 베자.” “모기 없애는 풀이 풀씨에 있다고 한다. 그걸 가져다 쓰자.” “천연 스프레이 같은 걸 쓰면 모기가 잘 안 온다.” “모기도 생명이다. 무조건 죽이는 방법은 안 좋다.” “아직은 봄이니까 긴 팔을 입고 다니자.” “문을 잘 닫고 다니자.” “장난으로 모기를 잡지는 말고 목초액을 뿌리는 등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쓰자.” “방충망을 달아달라고 하자.” “계피를 쓰면 좋다.” “전기를 사용해서 잔인하게 죽일 건 없다.” “밝은 색 옷을 입자.” “마늘 주스를 창틀에 바르자.”

아이들은 자연의 품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한테 자연은 따뜻함과 넉넉함과 겸손함을 가르칩니다. 자연의 기운과 포근한 빛이 시나브로 아이들한테 스며드는 것입니다. 흙을 밟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은 보들보들한 흙처럼 점점 더 보들보들해지고, 나무를 보고 나무를 안고 나무를 탔던 아이들의 마음은 굳센 나무처럼 점점 더 굳세어집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커가면서 생명과 사람다움을 고민하게 됩니다. 또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들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온 몸으로 깨우치곤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것이 한데 어울려 사는 게 행복하고, 다름이 경쟁을 낳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협력, 각 개체를 넘어선 온전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내가 곧 자연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인 CAMP(Center for Asian Mission for the Poor)의 주력 사역은 아시아지역의 절대빈곤지역에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교육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닐라의 도시빈민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대표적인 빈민가인 톤도의 경우에는 학령기 아동들은 많은데 이들을 가르칠 교육시설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초등학교 입학의 경우 선행학습이 되어 있는 유치원을 마친 아이들에게 입학의 우선권을 주는 안타까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필리핀도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학교의 부족은 이런 무상교육의 혜택이 무색할 정도로 최하층 빈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빈민가의 아이들은 유치원 교육의 혜택이 더욱 어렵습니다. 교육의 출발점에 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구조는 이들에게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고통의 악순환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해결하고 가능하면 한 명의 아이들에게라도 최소한 인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 유치원 건축이라 판단한 저희는 단체설립 초기부터 빈곤지역에 소규모의 유치원을 계속적으로 건축하거나 리모델링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CAMP는 이러한 건축협력에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일단 일방적인 한국의 지원방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좋은 협력자를 구해서 그들과 함께 모든 일을 진행합니다. 우선 건축부지는 현지 단체에서 제공을 하고 한국측은 건축비를 책임집니다. 건축에 있어서도 단순히 돈만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전 과정에 개입해서 엉뚱한 지출요인은 제거합니다. 건축 후에는 재산권과 운영권을 현지 단체가 전적으로 행사합니다. 물론 목적이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운영도 일부만 협력하는 형태입니다. 이런 방식의 지원은 현지단체가 자생력을 갖고 책임감 있는 운영을 통해 철저하게 의존적이지 않는 교육시설로 자리잡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3번째 건축을 마치고 네 번째 건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통 건축에 소요되는 비용은 일반적으로 1천만원 내외입니다. 이 비용은 순수 건축비입니다. 후원자에게는 진행비 등을 부담시키지 않고 필요 경비는 CAMP 자체 경비로 진행합니다. 요즘은 환율이 불안정해서 실제 요청 금액보다 공사비가 더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CAMP는 이러한 것을 예상해서 공사비를 부풀리거나 추가요청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역에 있어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 건축을 진행할 지역은 마닐라 퀘존시티의 빠야타스라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마닐라에 십여개 있는 쓰레기 매립장 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정착민들의 자녀들을 위해 유치원 건축을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 건축에는 지난해 여름 빈곤지역에서 사역에 동참했던 부산의 한 가정에서 담당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전직 교사였던 권사님 가정은 빈곤지역의 처절한 상황을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가셨는데 이곳을 잊지 못하고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치원 건축을 협력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의 유치원, 작지만 그곳에서 70-80여명의 아이들이 매년 새로운 인생을 위한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무더운 가운데도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쉽지 않은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이곳이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터전이라는 사실이 입에서 감사의 말을 끊이지 않게 합니다. 지금 이곳 마닐라의 빈곤현장에는 한국교회의 청년들 40여명이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2백여명의 한국교회 청년들이 소중한 땀방울을 흘리며 2천여년전 예수께서 하셨던 가난한 이웃들과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우며 실천합니다. 이곳에서 한국교회의 미래, 그 희망을 봅니다.